<13. 나쁜 아저씨>




⁠⁠⁠⁠⁠⁠⁠⁠⁠⁣⁠⁠⁣⁠⁠⁠⁣⁠⁣⁠⁣⁣⁠⁠⁠⁣⁠⁣⁣⁠⁠⁠⁣⁠⁣⁣⁣⁣⁠⁣⁠⁠⁠⁣⁣⁣⁠⁠⁣⁣⁠⁠⁠⁠⁠⁣⁣⁣⁣⁣⁣⁣⁣⁠⁣⁠자현의 마지막 검진은 꽤나 오래 걸렸다. 이전 검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 유일한 특수 등급의 에스퍼라는 점에 더해, 세심하고 치밀하게 체크하라는 검진 의뢰자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다. 검진 의뢰자가 이 병원 의료 재단의 지주 회사 그룹 오너라는 점 또한 영향이 있었다.

20분쯤 지났을까, 권경우가 있는 룸의 문이 열리고 작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형, 저 나왔어요. 끝났대요.”

그는 습관이 될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했다. 별다른 말 없이도 자현은 그가 원하는 걸 아는 듯 순순히 와서 안겼다. 내키는 대로 허리에 팔을 둘러 껴안자 마주 안아 오는 손의 온기가 등에서 느껴졌다.

그는 며칠 못 본 사람처럼 애인의 귀를 깨물고 목에 입술을 댔다. 들숨에 느껴지는 옅은 향은 그의 집에 있는 바디 워시 냄새였다. 권경우가 제멋대로 꽉 끌어안고 깨물어도 자현은 싫은 기색도 없이 작은 웃음만 흘렸다.

권경우는 자현의 검진 가운을 풀어서 벗겨 주기 시작했다. 검사가 끝났으니 옷을 갈아입혀 데리고 나가려는 것이다.

날렵한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몸은 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사람처럼 색이 희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상의 태양 아래에서 움직인 시간이 오히려 드물 테니까.

반듯한 허리도 막상 만져 보면 솜털이 남은 것처럼 부드럽게 손에 감겼다.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지 며칠 되지 않은 아홉 살 연상의 애인에게 이런 몸을 맡겨 놓고는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 남들 앞에서는 뻣뻣하고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딱딱하게 굴면서 그의 앞에선 무방비한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형은 배 안 고파요? 저희 밥 뭐 먹을까요?”

“글쎄. 뭐가 좋을까…. 자현이는 제대로 안 먹어서 많이 배고프겠네. 이거 봐, 배가 납작하잖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장난스럽게 자현의 배와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쓰다듬었다. 순진하고 착한 애인이 킥킥 웃으며 몸을 웅크리고 제 배를 만지는 손을 붙잡았다. 떼려고 시늉만 하는 듯이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그는 헐거운 병원 바지도 벗겨 치워 버리며 자현의 장골을 쓰다듬었다.

맛을 제대로 보면 모를까, 감질나게 빨아 보고 냄새만 맡은 게 고작이니 욕구가 식을 리 없었다. 그건 비단 성욕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었다. 뭐든 질리려면 양껏 먹어 봐야 한다.

하지만 아직 허리에 남은 타박상 자국이 다 지워지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주는 갈 상처였으나 자현의 재생력이 워낙 좋아 저만큼이나마 나아졌다. 그래도 게이트에서 부상을 입었던 애를 벗겨 먹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육체는 반응해도 이성으로 눌렀다.

“전 다 좋은데…. 오늘은 밖에서 안 먹어요?”

“처리할 게 많아서.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집과 회사만 왔다 갔다 할 거야.”

그는 친절하게 대답하며 옷을 마저 입혀 주었다.

자현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건 제 욕심 때문은 아니었다. 도주한 백태건을 아직 찾지 못해서였다. 백태건의 가장 큰 패이자 전력은 권자현이다. 어떤 식으로든 접촉할 루트를 피해야 하기에 식사도 밖에서 하지 않기로 했다.

아래에서부터 셔츠 단추를 채우다 자현의 가라앉은 눈과 마주했다. 권경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미묘한 차이지만 평소보다 텐션이 낮았다.

“왜 그래.”

“뭐가요?”

“왜 이렇게 축 처졌어. 응?”

“제가요?”

“만화 못 보게 해서 그래?”

그는 나름대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유를 생각해서 물어보았다. 그러자 자현이 웃으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맞아요. 형이 마인드 못 보게 해서….”

“그게 그렇게 큰 이슈일 줄은 몰랐는데.”

“사실 배고파서 그래요.”

그렇게 대답한 자현은 권경우가 옷을 다 입히고 손을 떼자 툭 몸을 기댔다. 정말 배가 고파서 그런 건지, 아니면 게이트에서의 데미지가 남아서 그런 건지, 평소답지 않은 어리광이었다. 권경우는 자신의 입꼬리를 매만져 누르고 자현을 데리고 차로 돌아갔다.

회사는 그리 멀지 않았으나 돌아가는 내내 자현은 말수가 적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미리 비서를 통해 말해 놨던 도시락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락이라 부르기 미안한 셰프의 고심작을 자현에게 다 먹인 뒤에야 권경우는 참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는지 물어봐도 될까? 네 옛날 가이드랑 뭘 했다고?”

아까 분명 권자현은 가이딩을 안 받은 게 아니라 못 받았다며 ‘옛날 가이드들도’라는 말을 꺼냈다. 자현은 권경우의 추궁 같은 질문에 순순히 대답했다. 무덤덤한 목소리다.

“뭘 한 게 아니고 못 한 거였어요. 매칭률이 안 나와서요. 옛날부터 담당해 주던 가이드를 포함해서, 아무하고도요. 높아 봐야 1~2%, 거의 0%였거든요. S급이라는 가이드들도 몇 명 비공개로 만나 봤는데 소용없었고요.”

“…….”

권경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엄청난 고백을 하면서도 전처럼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그래서… 저한테는 형밖에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형이 아니면 안 돼서…. 저는 형한테만 가이딩 받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그걸 왜 숨겼던 거야? …나한테 이상한 말을 들어 가면서.”

권경우는 침묵하다 부드럽게 물었다. 그는 마치 우는 사람을 달래는 듯한 손길로 자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자현은 온순한 강아지처럼 그 손길을 받았다.

“…징그럽게 느껴질까 봐 그랬어요. 그게 제 큰 약점이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그걸 말하면, 형이 없으면 저는…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해 버리는 거니까요.”

“그럼 지금은 왜 말할 생각이 든 거야.”

자현은 자신의 뺨에 얹어진 형의 손을 감싸고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제가 형을 많이 좋아해서요. 그리고… 형도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평소보다 차분한 말투에 눈 맞춤을 피하는 듯한 행동.

권경우는 자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가이딩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은 분명 엄청난 고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태도를 단순히 쑥스러워서라고 치부하기엔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는 찝찝한 위화감을 느끼며 부드러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

“그건 그냥 제 짐작이니까,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제 마음대로 생각하면 형이 기분 나쁠 수도 있고….”

권경우는 그의 뒤에 있는 소파에 앉으며 자현의 허리를 끌어다 그의 무릎에 앉혔다. 그리고 자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췄다.

“형이 널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애인 삼는 사람으로 보였어?”

“그건 모르겠지만, 형은 친절하고… 제가 부탁한 거니까요.”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이만한 남자를 하루 종일 끼고 다니고 뽀뽀하고 좆도 빨아 준다고? 자현이는 형을 어떤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부러 질 낮은 단어를 선택한 보람이 있는지 자현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낮은 웃음을 흘리는 그를 보던 권경우가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바쁠 때 형 없다고 개인 가이드들이랑 질펀하게 뒹굴까 봐 매일 걱정했는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건 그런 문제가 없었어도 안 그랬을 거예요. 저는 형 애인이니까….”

“이런, 목숨이 달린 건데 위험 상황에서 애인 같은 걸 신경 쓰느라 가이딩을 피하면 안 되지. 가이딩 기초 교육에도 나왔던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형은 제가 다른 가이드한테 가이딩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아니. 네 전담 가이드를 항상 붙이고 다니면 되잖아. 그런 간단한 생각을 못 하다니, 자현이가 많이 피곤한가 보네.”

하하…. 힘 빠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 길지 않은 침묵 뒤에 속삭이는 듯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형도 저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좋아한다고 말해 달라니,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가 보인 태도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흑심이 가득한 인간의 그것일 텐데.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지금껏 겪어 본 적 없는 욕구를 무릎 위의 남자에게 느끼고 있단 건 확실했다.

당장 옷을 벗겨 하체를 붙이고 싶어 안달 난 것을 참고 있을뿐더러 몸 어디든 빨고, 그러다 못해 좆대가리도 맛있다고 입에 물었는데 호감이 없지는 않겠지.

그게 정확히 무슨 감정이 됐든 간에 이 정도의 포텐셜과 능력을 가진 에스퍼를 손안에 붙잡아 두는 데 애정 표현 정도는 아주 값싼 대가였으니, 진심이든 아니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혀 밑에 모래라도 들어간 것처럼 껄끄러움을 느끼며 그는 정답을 피해 물었다.

“왜 오늘따라 응석을 부리지? 무슨 일이야. 도와줄 테니까 형한테만 조용히 말해 봐.”

“…….”

“응? 검사 전만 해도 그렇게 신나 있더니, 배고파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의료진이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권경우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자현에게 대답을 종용하듯 눈을 맞췄다. 내내 덤덤한 표정을 하고 있던 자현은 형과 눈을 마주치다 표정을 무너트렸다. 순간 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찡그리듯이 웃음을 짓고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이 저랑 5번 안 해 줘서요.”

“하….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진짜예요. 진짠데?”

“그래, 진짜인 걸로 해. 처음엔 배 만지는 것도 기겁하더니, …응? 배 속에 형 거 넣는 건 그렇게 하고 싶어?”

성희롱에 가까운 뒷말은 목소리를 낮추어 자현의 귓가에 속삭이며, 웃옷 속으로 손을 넣어 추행하듯이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권자현은 그게 이상한 짓인 줄도 모르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 형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고개를 묻었다. 시키지 않아도 먼저 안기는 무게감이 꽤나 기껍게 느껴졌다.

“…형도 저 좋아하는 거죠?”

“애인이고 가족인데 그럼, 당연히 좋아하지.”

“…….”

“일 끝나면 마중 나가고, 집에 데려와 재우고 먹이고 입히고, 하루에도 몇 번을 입술 문지르고 가이딩을 해 주고… 여기서 얼마나 더 예뻐해야 내 애인이 만족할지 모르겠는데.”

“…감사합니다.”

“…….”

“사랑해요, 형.”

“…….”

무언가 찔린 사람처럼 길게 말을 늘어놓는 자신과 달리 자현의 말은 간결했다. 권경우는 아무 대답 없이 자현의 등을 감싸안았다. 그는 입안에 모래가 낀 듯한 감각을 느끼며 왜 자신이 이 쉬운 대답을 하지 못했는지 의문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가이딩은 받을 수도 없었다는 고백은 분명히 자현에겐 약점이었고 제게는 이점이었다.

애정에 의한 종속뿐 아니라 직접적인 목숨줄까지도 자신이 완전히 틀어쥐고 있었다는 사실. 바깥에 드러나면 분명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있는 그 사실을 직접 알려 줄 만큼 신뢰를 얻었다니. 맹수가 길든 개처럼 얌전히 목줄을 하고 그 줄 끝마저 제게 건넨 셈이다.

그렇게 약점을 노려 파고들고 필요한 것을 내어 주어 의지하게 만드는 건 자신의 일관된 전략이 아니던가? 그러니 자신이 권자현의 생존에 필요한 인간이라는 진실에 기뻐해야 할 텐데….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계산과 달리 긍정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 생긴 호감과 가족을 갖고 싶어 생긴 애정을 성애로 속여 여기까지 만들었다. 언제 어디서든 삽입하겠다 바지를 풀어 내려도 괜찮다고 받아들이는 애인.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먼저 말하며 애정을 기다리는 착하고 귀여운 애인이 되게 만든 건 분명 자신임에도.


***


공항에서 인계 중 도주한 백태건은 52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잡히지 않았다. 가장 먼저 한국의 전 공항에 즉각적인 통제 조치가 취해졌고 해당 지역에서 뜨는 항공편들 역시 일시적으로 이륙을 보류시켰다. 대외적 사유는 적당히 꾸며 냈다. 불법 약물의 대량 적발, 혹은 미확인 화학 물질이 검출된 화물의 발견.

한국행 항공편은 전부 명단과 보안 기록을 재검증했으니 항공편을 이용해 공항을 벗어났을 가능성은 없었다.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해상 경로로 빠져나갈 가능성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모든 항만과 선착장에도 통제 인력이 수백 명 투입되었다.

하지만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았으니 땅굴이라도 파서 도망가지 않는 이상 그 지역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섬으로 요양 보내 여생을 지내게 해 주겠다는 그런 안이하고 온건한 방식을 선택해서는 안 됐는데. 그 인간이 얼마나 대단한 야망을 갖고 있다 한들 나이가 있고 다리도 성치 않으니 무모한 짓은 하지 않으리란 판단을 한 게 실책이었다.

또한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죽였다가 자현이 백태건의 죽음을 알아차릴까 봐, 그 사실에 슬퍼하며 아버지 같았던 이의 사망 이유를 알아내려 들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그런 거였다.

본디 죽은 사람의 과거는 미화되기 마련이지 않던가. 죽이고 나서 그 새끼가 그런 짓을 했노라고 말한다면, 살인자의 변명으로 보이겠지.

돌이켜 보면 멍청한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백태건은 그 애의 삶을 망가트린 폐기물이었으나, 자신 또한 무결하지 않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백태건이 권자현을 망가트리지 않았더라면, 권자현이 자신을 필요로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에 필요로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처럼 희롱당하는 순해 빠진 애인이 되어 주진 않았겠지. 제게 가족이 되어 달라고 한껏 저자세로 부탁할 일도, 제집에 데려와 눌러 앉힐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형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애 취급을 하며 손을 타게 만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상처를 양껏 이용해 먹고 있으면서 상처를 만든 자에게 분노할 자격이 있나? 게다가 거짓말로 구슬려 뭣 모르는 어린애의 몸뚱이까지 벗겨 먹고 있는 데다, 이 짓을 그만둘 생각도 없으니 질이 더 나쁘다.

“형. …형?”

권경우는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자현이 자신을 부르며 손을 살짝 잡고 있었다. 팔뚝 상완 가장 위쪽에는 조금 전 연구원으로부터 받은 펄스 리미터를 착용한 채였다.

펄스 리미터, 내부 프로젝트 코드명 NI-6은 기존 시제품에서 개선된 버전으로 이미 두 차례의 개발 사이클을 거쳐 안정성과 성능이 향상됐다. 그럼에도 권자현의 능력치를 컨트롤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아직 테스트할 여지는 남아 있었다.

“미안, 생각을 좀 하느라. 역시 팔에는 효과가 없네. 다른 위치도 테스트해 볼까.”

모니터를 확인한 권경우는 자현의 팔에 매여 있던 리미터를 풀었다. 단단하지만 휘어지는 재질로 된 프로토타입은 지난번에 보았던 버전보다 훨씬 외적으로도 출시에 가까워진 형태였다. 검은색 무광의 굵지 않은 띠는 얼핏 보면 그저 특이한 액세서리로 보이기도 했다.

“다른 위치….”

“그래. 척추에 가까울수록 작용 효과가 커진다고 했으니, 손목은 해 볼 필요도 없고.”

에스퍼의 에너지 흐름이 가지는 경로는 인간의 신체 중심인 척추와 대동맥과도 유사하다. 신체 흐름을 제어하는 역할이니 만큼 위치에 따라 작용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길이 때문에 허리는 안 될 거고, 확인해 볼 데가 별로 없겠네요.”

“그래. 몇 군데 없지. 허벅지 제일 안쪽이라거나.”

권경우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잠시만’ 하고 말하며 자현의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대동맥이 위치한 자리다.

굵기를 가늠하려 만져 보고 적당한 위치에 리미터를 채우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리미터는 원래 상완에 맞춰 제작된 물건이라 길이가 약간 모자랐다.

옷이 없는 맨다리에 시도해 보기 위해 바지를 풀어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허벅지 안쪽의 상대적으로 연한 살을 주무르듯 가늠하다 리미터를 채웠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긴 해도 간신히 체결에 성공했다.

“자, 됐네.”

권경우는 일어나 자신이 만든 자현의 모습을 감상했다. 상당히 야한 꼴인데도 자주 옷을 입히고 벗긴 탓인지 민망해하지도 않고 얌전했다.

그는 자현의 바지를 다시 올려 준 뒤 ESP 테스트용 특수 전극을 쥐여 주었다. 테스트 자체는 출력이 제어되는지 확인만 하면 됐기에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다만 권자현 에스퍼의 출력량을 감당하면서 망가지지 않고 측정 가능한 장비가 세계적으로도 몇 개 없을 뿐이다.

그렇게 진지한 듯이 실험하고 있지만 실체는 상당히 불순한 의도였다. 그는 자현의 뒤로 가 전극 위치를 고쳐 주며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만지작거렸다. 옷 아래로 허벅지를 조이고 있는 리미터의 촉감이 느껴졌다.

“성공하면… 너 이러고 형이랑 5번 해야 돼. 알아?”

“알아요. 제가 하자고 얘기한 거잖아요.”

“그럼 다행이네. 꽤 볼만하겠는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자현이 뒤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며 물었다.

“형은, 제가 이런 거 차고 있는 게 좋아요?”

“글쎄. 그런 취향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생길 수도 있고.”

“그렇구나….”

자꾸만 자길 좋아하는지, 뭘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게 귀엽지만 불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늘 밤에는 제대로 5번을 시도해 보기로 조금 전에 약속했는데도 이랬다.

진짜 애인이면 삽입 섹스를 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고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하지 않으니 초조하게 만든 것 같았다.

권경우는 자신의 목소리에 묻은 웃음기를 숨길 생각도 없이 자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왜, 형이 이런 거 좋다고 하면 뭘 하게.”

“그냥… 물어봤어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자현의 귓바퀴를 깨물어 맛보고 싶은 폭력적인 충동을 애써 눌렀다.

매번 자기가 잘하겠다, 착하고 말 잘 듣는 좋은 애인이 되겠다며 이미 다 달성한 내용을 공약으로 세우던 권자현이다.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하겠다는 말도 세 번 넘게 들었다.

물정 모르는 데다 형이 하는 말을 다 믿게 만들어 놨으니, 침대 위에서 무슨 괴악한 걸 요구해도 순순히 들어줄 터였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는데 굳이 그럴 생각 따윈 들지 않았다.

“형이랑 밀린 숙제 다 하려면 이상한 거 할 시간이 없을걸.”

그렇게 말하고 이를 세우는 대신 입술로 귓바퀴를 물었다 놓으며 손을 뗐다. 몸을 돌려 특수 재료로 제작된 반투명한 문을 지나 테스트룸 밖으로 나갔다. 측정값이 출력되고 있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다 사인을 보내자, 미리 약속된 대로 자현이 손에 쉰 전극에 에너지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잠시 뒤, 모니터는 초록색으로 안정권 수치의 출력량을 띄웠다.

“…성공인가?”

성공했다면 기껏해야 D등급 에스퍼 수준의 근력밖에 내지 못할 것이다. 일반인 기준으로는 그것조차 충분히 위협적이겠지만, 까딱 실수한다고 목숨이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숫자는 몇 초 뒤 빠르게 폭증하며 1만을 넘었다. 화면 한쪽에 붉은 경고문이 깜박였다.

[경고! 출력 측정값이 안정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현재 상태에서는 측정 결과의 정확도가 보장되지 않습니다.]

[출력 추가 상승 시 장비 파손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는 테스트를 중지시키며 안쪽을 향해 종료 사인을 보냈다. 권경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자현은 늘어트린 양손에 전극을 든 채로 입을 열었다.

“될 줄 알았는데… 아깝네요.”

“아깝지만 성공적이지. 가능성은 봤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현의 하의를 내리고 아이템을 풀어냈다. 길이가 모자라 꽉 조여 맨 탓에 허벅지에 옅게 남은 띠 모양의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오늘 밤 5번을 하기로 한 건 그에게 있어서도 필요한 일이었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라 시도 때도 없이 추행하듯 만져 대고 있었으니까.

이런 건 애인 사이에 당연한 일이라고 학습된 자현이 그를 물끄러미 보다 말했다.

“그래도 목에 착용하면 무조건 될 것 같은데요….”

자현의 말대로, 다른 위치는 다 실패했으나 아직 시도할 수 있는 위치가 하나 남아 있었다.

“그렇겠지.”

또한 작동 원리상 가장 가능성 높은 위치이기도 했다. 이내 권경우의 손에 들려 있던 리미터는 자현의 목에 채워졌다. 검은색에 핀 버클이 달린 구조.

그냥 봐도 개 목걸이, 좋게 보면 개 목걸이처럼 디자인된 액세서리, 그쯤이다.

애정과 필요성, 신뢰, 거짓으로 만들어 낸 감정과 진실, 그 모든 것들로 자현의 목에 걸어 옭아매고, 종내에는 눈에 보이는 목줄까지 채우게 되었다. 그것도 저 스스로 채워 달라 말하게 만들었고.

그는 아이템이 잘 동작하도록 딱 맞는 길이로, 그렇지만 조이지는 않게끔 만져 주며 말했다.

“추가 디자인 시안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어.”

“괜찮아요. 저만 이렇게 쓸 텐데요, 뭐. 그리고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아요. 뺐다 꼈다 하기도 편하고, 움직일 때도 덜 거슬리고요.”

“…….”

“그리고 형이랑 둘이 있을 때만 쓸 거니까요.”

…형이랑 야한 짓 할 때만요.

속삭이듯이 뒷말을 덧붙인 자현이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이런 건 형 앞에서만 보여 줘야 되는 거야.”

“당연하죠.”

“앞으로도 계속, 무조건. 알았어?”

장난을 섞어 엄하게 추궁하자 자현은 그런 형을 가만히 보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찰나였지만 물기에 젖은 눈동자가 보였다. 너무 무섭게 굴었나 싶었을 때, 자현이 웃음을 터뜨리며 속닥거렸다.

“알았어요. 앞으로도 계속… 죽기 전까지, 평생이요.”

“…….”

권경우는 그런 자현의 뺨을 손으로 감싸고 한참을 쓰다듬었다.

백태건은 DH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는 이 물건의 개발을 두고 ‘알려진다면 에스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 말했었지. 그 또한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이 물건은 폭주 확률을 낮추고 출력을 적절히 제어하게 하는 기능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능력이 물건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만도 했으니까.

모든 물건은 자체에 선악이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 여겼다. 당연한 말이다. 자현은 DH에서 나온 물건들이 많은 이능력자들의 삶을 나아지게 했다고 말했으나, 그건 결과일 뿐이지 저 자신이 대단한 선의를 지녀서 그런 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물건에 음습한 의도가 없다고 더는 얘기하기 어려워졌다. 모두의 우상으로 자리 잡은 천재, 넘볼 수 없는 기록을 가진 1위 에스퍼가 고작해야 저보다 한참 나이 많은 남자에게 다리나 벌려 주기 위해 이딴 걸 목에 차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모욕적이다. 순해 빠진 애인만 그걸 모르는 채로 그의 손길을 얌전히 받을 뿐이다.

세상을 배우고 상식을 많이 쌓는다면, 나중에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모욕과 기만을 당했는지 알게 될까. 얼마나 비참한 꼴이었는지도.

그런 진실을 알아 불행하게 만드느니 이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게 낫겠지. 백태건을 잡아 제대로 치워 버리고 나서도 지금처럼 혼자 다니지 못하게 내내 곁에 묶어 둘 수밖에. 가족이자 애인이랍시고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잘못 걸린 것이 권자현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일 것이다.

“자현아. 형 회사로 올래?”

갑작스러운 말에 자현이 그의 손에 제 손을 올린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여기에, 제가 형 회사에 있는 거 아니에요?”

“임시 계약 말고. 공식적으로 소속을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는 거야.”

“UNGRA에서 나와서 DH로요?”

“그래. 게이트 공략 조직은 신설하면 돼.”

“…….”

“아니면 DH 산하에 다른 이름의 헌터 길드를 만들까. DH 타이틀이 부담스럽다면 내가 별도로 후원자를 해 줄 수도 있고, 방법은 많지.”

“하지만 저는….”

“국장님은 내가 설득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권경우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쓸 수 있는 아주 좋은 설득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현의 반응은 애매했다. 이런 유의 제안을 받을 때는 항상 강아지처럼 방방 들떠서 좋아하는 모습만 보았으니,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자현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을 하고 가만히 형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장관님은 저를 위해서 UNGRA에 들어온 거라고 하셨어요. 제가 특임관 자리에 있는 게, 제 능력을 키우고 특성을 유지하는 데 좋을 거라고요. 덕분에 저도 여러 정보를 받고 게이트에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었던 거고요.”

“그랬었지.”

“저는 어릴 때부터 장관님 밑에서만 있어서, 다른 데서는 어떻게 일하는지 잘 몰라요.”

“소속이 어떻게 되든 너는 너대로 지금처럼 하면 돼. 다른 사람이랑 같이 일하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게 있으면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받던 돈들도 두 배 이상은 챙겨 줄 거고.”

“저 원래도 많이 받아서 두 배로 주려면 아무리 형이어도 부담스러우실걸요.”

그는 뒷조사를 통해 자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버는지 대강 알고 있었으나, 그건 게이트 수당 등 다른 출처가 섞인 금액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은 제대로 정산되기도 전에 백태건의 손을 통해 흘러 나가 더욱 부정확했다. 하지만 얼마가 됐든 두 배는 챙겨 줄 용의가 있었다.

“UNGRA에서는 얼마 받고 있는데?”

“300이요. 계약 연봉 300억.”

예상치 못한 답변에 권경우는 침묵했다.

많이 받는다고? 300억 달러는 아닐 테니, 300억 원을 말하는 것일 텐데. 적어도 너무 적었다. 아무리 스폰서가 붙지 않는 공기관 소속이라 해도, 압도적인 세계 1위의 헌터가 공놀이를 하는 스포츠 스타보다 연봉이 적은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현의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는 잠시 말을 골랐다. 구태여 당장 현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형이 600억 정도는 충분히 줄 수 있지. DH 이름값을 뭐로 생각하는 거야, 응?”

600억뿐일까, 실제로는 천 억을 훌쩍 넘길 것이다. 계약 연봉 외에도 게이트 처리 수당과 각종 부수입을 제대로 정산한다면 서너 배는 될 테지.

백태건과 지저분하게 얽혀 있는 자금 라인은 다 잘라 버리고 깨끗한 계좌로 정리해 줄 예정이다. 얼마가 됐든 기존에는 자현의 수중으로 들어오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고생하고 아껴 가며 번 돈을 온전히 가져 보게 해 주고 싶었다.

어차피 함께 사는 이상 이 애가 돈 쓸 일도 없겠지만.

하지만 자현은 쉽게 알았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진행하고 있던 메시아 프로젝트도 마무리 지어야 돼요.”

“당연히, 그것도 마무리 짓게 지원하고 도와줄 거야. DH에서 최초로 영입하는 최고의 에스퍼인데 그 정도는 해 줘야 면이 살지.”

“돈 엄청 들 텐데…. 지금도 많이 들잖아요. 저 때문에.”

“알면 됐어.”

세계 부호 순위에서 앞자리 수가 달라질 만큼의 지출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형이 저한테 너무 잘해 주셔서, 그런 것들까지 다 받으면 제가 뭘 해야 형한테 갚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감사 인사 방법은 한 달 전에 합의 된 내용 아니었나?”

지금도 하루에 네다섯 번은 받고 있지만 앞으로 열 번씩 받으면 되는 일이다.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조금 웃은 자현이 불길한 무언가를 이야기하듯 운을 뗐다.

“형, 그런데… 제가… 들으려고 일부러 들은 건 아닌데요.”

“응.”

“형이 전화하는 거 조금 들었거든요. 저 신체 능력이 좀 좋잖아요. 귀도 좋은 편이라….”

“…아, 그래. 뭘 들었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장관님한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처럼 그렇게 들렸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DH로 오라고 말하는 것도 그것 때문인가 싶었어요.”

“…….”

“그런 게 아니면 장관님을 직접 뵙고 말씀드리는 게 예의잖아요. 그래도 저를 12년간 돌봐 주셨으니까.”

“…….”

“제 상관이시기도 하니까, 혹시라도 위험에 처해 계시면 제가 가서 도와드려야… 하고요.”

권경우는 그렇게 말하는 자현을 잠시 바라보다 여전히 목에 걸려 있는 물건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자현아.”

“네.”

“형이 좀 듣기 거북한 이야기를 할 거거든. 들으면 믿지 못할 수도 있고, 네가 많이 힘들 수도 있어. 여기서 하기엔 곤란하고… 먼저 이거부터 끝낼까. 마무리하고 차에 가서 얘기하자.”

권경우는 부러 다정한 목소리로 설명한 다음 미소 지으며 ‘응?’ 하고 대답을 종용했다. 자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스트는 예상대로 성공적이었다. 목에 딱 맞게 착용하자 세 번째로 개량된 리미터는 자현의 출력도 제어할 수 있었다. 비록 임의적으로 출력을 강하게 하면 금방이라도 망가질 것처럼 불안정해지긴 했지만, 자현이 일부러 그럴 리 없으니 일단 목적을 달성했다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서의 할 일을 마무리하고 차에 탈 때까지, 자현은 장관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 착하게 기다렸다. 내일은 뭘 할지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에도 평소처럼 잘 웃고 귀엽게 굴었다.

걱정하던 권경우는 약간이지만 안도하며 휴대폰에 숨겨져 있던 사운드 파일을 꺼내 재생시켰다. 백태건과의 대화에서 백태건이 자현의 과거에 대해 얘기한 부분만 잘라 낸 파일이었다. 흥분한 늙은이의 무용담은 끝도 없이 이어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길었다.


[평화에 취한 시대 아닌가? 제법 외모가 괜찮은 어린애, 최초로 등장한 열 살짜리 각성자…. 내가 아니었더라면 전 세계에서 굉장히 탐냈겠지. 요즈음 에스퍼 광대들처럼 얼굴 팔아 딴따라 짓이나 했을지도 모르고. 그건 인류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선택이었던 거야.]


권경우는 녹음본을 들려주며 자현의 표정을 살폈다. 놀란 표정은 아니었다. 대신에 허공을 헤매던 눈을 서서히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래서 일부러 가스 폭발을 일으켜… 열 살짜리의 폭주 사고로 위장했다?]


이어서 권경우의 목소리가 나오자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 얼굴이 꼭 형이 자기를 구해 주길 바라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여서, 권경우는 자현의 손을 잡아 주었다. 차게 식은 손가락을 얽어 잡자 자현이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자네, 가스 폭발을 본 적이 있나? 그건 폭주 사고로 착각하기 어렵지. 그래서 그럴듯하게 연출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방식이 필요했거든. 그 녀석이 가진 능력은 불꽃 방출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원인과 배경이 어떻든 당사자가 알지 못하면 나는 그저 어려울 때 손 내밀어 준 은인이 되니 말이야.]


“…끝이에요?”

“그래.”

자현은 형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권경우는 자현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심하게 상처받을까 봐 들려주기 싫었건만, 어쩔 수 없이 가장 중요한 부분만 잘라 틀었다.

하지만 울 것처럼 괴롭게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숨을 흘리다가, 정작 입으로 내뱉은 건 짧은 웃음이었다.

“하하….”

꼭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권경우는 움츠러든 자현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안았다.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은 쉽게 끌려와 품에 안겼다. 괴롭게 숨을 헐떡이던 자현이 물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한테 하는 말이 진짜인 줄 알았어요.”

그는 말없이 자현의 등을 쓸어내리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무섭게 굴었지만, 그래도 저한테 잘해 주고, 저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봐도 참고… 그래서…. 저를 위한 거라고 말하고, 저를 구해 줬으니까… 그래서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좋았거든요….”

드문드문 끊기며 겨우 이어진 목소리나,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들. 울지도 못하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문드러진 감정을 털어놓을 뿐인 반응.

순하고 물러 터져서는 진실을 알아 버렸는데도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였다. 잘해 줘서 좋았고, 만나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했다니.

자기 부모를 죽이고, 수백 명을 죽인 죄를 열 살인 자신에게 뒤집어씌운 데다, 좋은 사람인 척하며 평생을 통제하고 이용해 온 작자에게 고작 이런 말밖에 못 하는 아이로 키워져서.

“응, 그래…. 좋았었구나. 그렇게 좋았어-.”

권경우는 자현을 달래기 위해 말꼬리를 길게 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녹음본을 직접 들려준 건 잘못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부상을 입을 때에도 신음 하나 입 밖으로 쉽게 내지 않던 자현이 난도질당한 사람보다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두고 보기 힘들어 얼굴을 들어 쓰다듬고 눈 밑을 조심조심 쓸어 주자, 자현은 아픈데 억지로 웃는 사람처럼 미소 지었다. ‘특성’에 맞지 않는다며 울지 않도록 배우고 자랐을까.

차라리 엉엉 울고 배신감을 토로하며 화내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좋았어요. 너무 좋아하게 돼서, 그래서… 솔직히… 안 믿고 싶었어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고 싶었어요. 조작이거나 합성 같은 거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

“진짜면 너무 힘드니까….”

거기까지 내뱉은 게 한계였는지 자현이 다시금 몸을 웅크렸다. 열이 오른 듯 몸이 뜨거웠다. 자신에게 기대도록 추슬러 안자 순순히 안겨 얼굴을 묻는 것마저도 너무 무르고 착해서….

꽉 안아 주고 머리카락에 가만가만 입술을 누르며 기분이 나아질 만한 말을 속삭이는 것만이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일 놀이공원 갈까? 테마파크. 거기 가고 싶어 했잖아. 형이 준 폰으로 계속 봤잖아. 기록에 많이 남아 있길래 하루 빌려 두라고 얘기해 놨거든…. 말 안 하고 몰래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

“어때. 편하게 놀 수 있을걸. 자현이도 주변 시선 신경 안 써도 되고. 형이랑 둘이서… 응?”


***


스테이터스 투자는 신중히 해야 한다.

보통 RPG 게임에서 스탯 전투력이나 지력, 마력, 그런 걸로 나뉘지만, TRPG처럼 복잡한 상호작용 룰이 적용되는 게임은 스탯 종류가 훨씬 많다. 운빨이라든가, 화술, 매력, 공감 능력, 명성, 협상처럼 사회적인 능력도 있고, 정신 안정도라든가 저항력 같은 멘탈 수치도 있다. 그 외에 카르마나 타락도처럼 신화적 배경의 스탯도 존재한다.

그러니까 내가 최근에 알게 된 건, 현실 세계는 RPG보다는 TRPG에 가깝다는 거다. 단순히 직업적인 재능만 랜덤으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스탯 종류가 아주아주 많으니까 조심해야 한다는 거지.

그리고 나는 스탯 투자를 좀 잘못한 것 같다.

에스퍼 능력에 포인트를 전부 써 버린 탓에 다른 사회적인 능력치가 0이었던 모양이다. 운빨이라든가, 직감이나 그런 것들.

물론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 초콜릿이 소원을 진짜 들어줄 줄은 몰랐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현실 세계는 랜덤 스탯이 비공개로 결정되는 방식이라, 진행해 보고 나서야 대충 짐작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현실 파악이나 눈치 같은 것도 0포인트인 게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럴 리가 있나?

어쨌든 이렇게 된 거 겸허히 자신의 문제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좀 학습 능력 떨어지는 멍청한 얘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나는 지금도 이게 다 꿈이었으면 하고 내심 바라고 있다.

영화나 게임 같은 데서는 기억 상실에 잘 걸리던데, 머리통을 깡 처맞는 걸로 잊어버릴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여긴 현실이니까.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선택지를 골라야 했다.

경우 형은 내가 장관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줄 아는 것 같다. 내가 장관님으로부터 음성 메시지를 받은 걸 모르니까 당연한 일이다.

장관님이 직접 얘기한 과거의 진실들은 당연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사실만으로 그렇게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왜 그럴까.

엄마 아빠한테는 미안하지만 지금은 얼굴을 거의 잊어버려서 그런지도 모른다. 가족사진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다. 부모님과 살던 집에서 사진을 가져오지도 못했다. 장관님이 그런 걸 자꾸 봐 봤자 더 슬퍼지고 약해지기만 할 뿐이라며 폐기했으니까. 울트라 마인드에도 가족을 잊고 진짜 영웅이 되는 에피소드가 나와서 다 그런가보다 싶었다.

내가 죽인 게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위안 삼을 수도 없었다. 방법이야 어쨌든 다들 나 때문에 죽은 건 맞으니까.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거겠지. 형이 나를 속였고 계속 속일 예정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어 버려서.

전체 녹음 파일이 아니라, 형이 했던 말들은 다 지운 채로 장관님이 말한 부분만 들려준 게… 그 사실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아파서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걸 듣기 전까지는 그래, 웃기지만 차라리 장관님이 재생했던 음성 파일 자체가 거짓이고 짜깁기한 것일 수도 있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하지만 형은 내게 증거와 확신을 줬고 … 그래서 나는 선택을 해야만 한다.

장관님은 메시지 마지막에 위치를 알려 주며 앞으로 3일이 한계라고 했다. 그 이상은 못 버틴다고.

그리고 권 대표의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신호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건 시간이 가까워지면 알게 될 거라며.


***


“좀 괜찮아졌어?”

권경우는 정원 의자에 기대앉은 자현에게 컵을 쥐여 주며 물었다. 집에 오는 내내 멍하니 창에 기대어 있던 모습에 잠시 밖에서 쉬도록 시간을 주었다.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돌아왔지만, 혹시라도 컵을 놓칠까 싶어 제대로 쥐도록 자세를 잡아 준 뒤에야 손을 뗐다.

“괜찮아요.”

너무 뜨겁지 않게 식힌 따뜻한 차를 홀짝인 자현이 그를 올려다보며 눈가를 접어가며 미소 지었다.

“억지로 안 웃어도 돼.”

권경우는 혀를 차며 자현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까는 그렇게 뜨겁더니 지금은 밤바람에 식어 약간 시원하다.

“아닌데… 그렇게 보여요?”

해가 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밝은 남색 하늘. 한쪽 면만 트여 있는 중앙 정원의 조명은 흐릿하고 약했다. 권경우는 자현의 곁에 앉으며 부드럽게 이름을 불렀다.

“자현아.”

“네.”

“장관님이 그렇게 좋았어?”

“…….”

자현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달싹이다가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방금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들어 했으면서 아니라니.

하지만 그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진실이 어떠한들 그 인간은 자현에게 12년간 돌봐 준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고, 자신은 고작해야 만난 지 4개월 정도밖에 안 된 애인 겸 형이니 불쾌한 것과 별개로 납득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었다.

혹여나 백태건이 잘못했다 말하며 돌아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가족이 얼마나 잘해 주건 첫 번째 주인만을 평생 그리워하는 개처럼, 그렇게 떠나 버릴 수도 있으니 싹을 잘라 두고 철저히 처리해야만 했다.

“…자현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그 아저씨 아주 굉장히 나쁜 아저씨거든. 너한테 나쁜 짓도 많이 했고. 여태까지 잘해 주는 척, 착한 척한 거야.”

그는 일부러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순화된 표현을 써 가며 조근조근 말했다. 그렇게 백태건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놈이 한 짓들에 대해 천천히 읊어 주었다. 형의 목소리를 조용히 듣던 자현이 대답했다.

“알아요. 처음부터 잘 이해했어요.”

“그럼, 어떻게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은 안 들어?”

“어떻게요?”

“화가 난다거나. 너를 그렇게 오랫동안 속이고 힘들게 했는데.”

자현은 그렇게 말하는 형을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마치 오랫동안 말한 적 없는 사람처럼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잘 모르겠어요. 화는 안 나고요. 그냥…. 그냥 조금 많이 힘들어요.”

“갑자기 너무 많은 걸 알게 되면 그럴 수 있지. 당연한 거야. 괜찮아.”

권경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현의 등에 팔을 둘러 끌어안았다.

“…….”

“누가 우리 자현이를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을까.”

부러 어린애 달래듯 유치하게 어르자 자현이 참지 못하고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하….

형이 제 기분과 무거운 분위기를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굴며 얼러 주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했다.

그는 거기에 더해 정말 우는 애라도 달래는 것처럼 웃옷 속에 손을 넣어 배와 가슴을 만져 간지럽히며 목에도 입술을 문질렀다. 어쩔 도리 없이 웃어 버린 자현이 도망가지 못하게 껴안은 채로 장난치다 적당히 멈췄다. 다시 조금 열이 오른 자현의 뺨에 쪽쪽 몇 번 더 입을 맞춘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장난스레 말했다.

“나쁜 아저씨는 잊어버리고 형이랑 살면 되지. 그치?”

“…….”

“힘들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형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DH로 들어와서 당분간 좀 쉬고 노는 건 어때. 재충전 기간으로.”

“쉬고 놀아요?”

“그래. 놀이공원도 가고. 형이 아까 말했잖아. 내일이라도 갈 수 있는데. 응?”

“내일….”

“그래, 싫어? 며칠 쉬고 나중에 갈래?”

“아뇨, 내일 가도 돼요? 형 바쁠 텐데.”

“형이 바쁘긴 뭘 바빠. 남한테 시켜 먹는 거밖에 안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기업 회장님의 자기 직업 비하가 제법 스트라이크였는지 자현이 킬킬대고 웃다가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내일 바로 가요. 그런데 형, 저 부탁이 있는데요….”

비밀이라도 말하듯이 귓가에 대고 속닥거린 것에 비해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감사 인사로 뺨에 뽀뽀를 받은 권경우는 참지 못하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벌어진 잇새에 혀를 넣어 방금 본 붉은 입안을 핥고 차 맛이 묻어나는 타액을 양껏 빨아 먹었다.

뺨은 밤공기에 창백하게 식었는데 입안은 여전히 따끈했다. 따뜻한 혀를 맛보자 더한 것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끓었다. 배를 만지고 그 위에 있는 가슴의 돌기를 입에 물고 핥다가, 정 안 되면 좆이라도 입에 물고 실컷 빨아 먹고 싶은 욕구.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애써 참고 자현을 일으켜 집 안으로 데리고 갔다.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겉옷을 벗기고 셔츠 단추를 풀어 내리며 말했다.

“오늘 형이랑 야한 거 하기로 했는데, 슬픈 자현이가 돼서 못 하겠네.”

농담조였으나 진심이었다.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으니 쉬게 해 줘야 한다… 이성적으로 그렇게 판단해 눌러 참고 있었다.

또한 전처럼 곁에 끼고 자면 그냥 놔두지 못할 것이다. 힘든 애를 괜히 지분대지 않도록 오늘 밤은 거리를 둬야 한다.

“…….”

자현은 잠시 아무 대답도 없었다.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얼굴은 냉담하고 서늘했다. 하지만 그는 이 안에 든 알맹이가 얼마나 무른지 알고 있기에 그런 얼굴에서마저도 귀여움을 느꼈다.

“형은 오늘 나쁜 아저씨 때문에 조금 늦게 잘 거니까 먼저 가서 자고 있어. 푹 자고 일어나야 내일 재밌게 놀지.”

그렇게 말하며 권경우가 문밖으로 나서려 하자 자현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고개 돌려 의아한 눈빛으로 묻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안 해요? 5번… 하는 줄 알았는데.”

발랑 까져서는 대놓고 섹스하자고 꼬시는 애인이라니. 그는 인내심을 바닥까지 긁어다 쓰기 위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다음에 해. 오늘은 쉬고.”

욕망을 누른 목소리가 다소 성마르게 튀어나왔다.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런, 제 목소리가 부정적으로 들렸을까 변명하려던 찰나에 자현이 입을 열었다.

“형. 혹시…”

“응.”

“…제가 자꾸 하자고 해서, 억지로 하는 건 아니죠?”

“억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흘렀다. 억지로라니, 제 행동을 보고도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인가? 참는다고 참았으나 그리 담백하게 굴지는 않았단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떠올린 건지.

그는 자현의 허리를 끌어안고 허벅지 밑에 무릎을 끼워 넣어 바짝 밀어붙였다. 그 상태로 손을 끌어와 제 왼쪽 허벅지에 올려 바지에 짓눌린 성기를 만지게 했다. 흠칫 떨리는 눈동자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고작 이 정도의 자극에도 아래가 뻐근할 정도로 피가 몰린다. 골수까지 끌어다 엮었던 인내가 끊어지려 했다.

“그래…. 자현이가 자꾸 졸라서 억지로 이렇게 만들었잖아.”

응? 이거 어떻게 할 거야. 그는 자현의 귓가에 입술을 지분대며 비열한 논리를 속삭였다. 어린 애인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의도가 불순하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자현이 손을 움직였다. 조심스런 손길로 형의 것을 감싸고 문지르는 손길이 서툴다. 이성한테만 가이딩 받았다고 했었나? 연애는 안 해 봐서 그런지 뭣 모르는 애같이 구는 탓에 경험이 있다는 걸 종종 잊는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조심스럽게 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지금껏 참은 자신 또한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자현의 하의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제 성기를 감싸고 있던 자현의 손이 흠칫 떨렸다. 느린 손길로 자현의 바지를 풀고 검은색 드로즈까지 끌어 내리자 날렵한 허리선과 좁은 골반이 드러났다. 그는 자현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반쯤 서서 아직 말랑한 살덩이가 손 안 가득 뜨겁게 잡혔다.

“흐윽….”

그가 손을 살짝 세게 쥐자 자현이 긴장과 흥분이 섞인 숨을 할딱대며 얼굴을 어깨에 묻었다. 손안에서 빨라진 혈관의 맥박이 느껴진다. 표면이 아직 젖지 않아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지는 자지는 붉은빛이 돌았다. 몇 번 만져 보고 먹어도 봤지만 여전히 보기 좋고 맛있게 생긴 좆이었다.

선단을 엄지로 문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울방울 투명한 액체가 맺혔다. 경험도 없는 남자의 엉망일 게 뻔한 손짓에도 쉽게 느낄 만큼 손을 많이 탄 티를 내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는 흥분해서 성마른 손길로 자현의 성기를 문지르고 선단을 손가락 끝으로 비볐다. 안절부절못하고 끙끙대는 자현의 귓불을 가볍게 물고 소근거렸다.

“가만히…. 가만있어야지. 5번 하고 싶다며.”

“…형.”

숨소리가 반쯤 섞인 쇳소리로 자현이 형을 불렀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권경우는 자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는 부분이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딴소리를 입에 담았다.

“지금은 애인처럼 불러야지. 섹스하고 싶다면서 그렇게 막내 동생 같은 목소리로 형을 부르면, 형이 좆 세울 수 있겠어?”

진작에 아래가 터질 듯이 좆을 세워 놓고 되도 않는 트집이다. 그는 헛소리를 해 놓고 자현이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게끔 손에 쥔 성기를 거칠게 흔들었다.

형, 형…. 우는 듯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바짝 선 성기는 오래 지나지 않아 정액을 픽픽 쏘아 냈다. 처음에는 진하더니 요즘 자주 만져 주고 빼 줘서인지 정액이 묽었다.

여전히 걸치고 있던 재킷과 바지에 자현이 흘린 정액이 묻었으나 그것조차 기꺼웠다. 그는 안에 남은 것을 짜내듯이 성기를 훑어 내면서 자현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형 겉옷 안 주머니에 손 넣어 봐.”

사정 직후, 탈력감으로 힘이 빠져서 기대어 있던 자현이 흐릿해진 눈을 깜박였다.

“…안주머니요?”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는지 더듬거리며 옷 안을 뒤진다. 이내 손에 무언가 잡히자 멈칫하더니 완전히 밖으로 꺼냈다. 아까 실험하고 가지고 나온 리미터였다. 자현은 눈을 내리깔고 더운 숨을 내쉬며 그것을 제 목에 걸기 시작했다.

권경우가 도와주긴커녕 밑을 지분대며 주무르고 있는 탓에 몇 번 미끄러지고 더듬거렸으나 오래 걸리지 않아 제대로 착용했다. 바로 느껴지는 변화 같은 건 없었다. 형을 꽉 안아 으스러트리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있던 몸에 긴장이 조금 풀렸을 뿐이다.

“혼자서도 잘하네.”

제 손으로 자현이 불순한 목적의 아이템을 착용하게 한 권경우는 허벅지에 걸쳐진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단추가 다 풀린 셔츠까지 끌어 내렸다. 벗은 몸에 남은 건 양말이랑 불순한 목걸이뿐이다.

그는 자현을 침대에 눕혀 뒤를 지분대기 시작했다. 한 쪽 다리는 어깨에 걸쳐 두고 벌어진 다리 사이 깊은 곳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젤을 가득 묻혀서 주름진 구멍 입구를 문질렀다. 점성 있는 윤활제가 구멍에 닿았다 떨어지며 나는 차닥차닥하는 작은 소음이 부끄러운지 민망한 듯 눈을 굴리던 자현이 팔로 얼굴을 가렸다. 좆은 바짝 세우고 구멍을 움찔대며 발을 오므리는 꼴이 욕이 치밀어 오를 정도로 야했다.

하지만 발랑 까진 어린 애인은 형이 손가락도 넣지 않고 구멍만 간질이고 있는 게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그냥 빨리 하면 안 될까요?”

“뭘?”

“그냥…. 읏….”

그는 애인이 바라는 대로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미끄러트렸다. 빨리 쑤셔 달라 말한 것 치고는 긴장을 풀지 못하고 손가락을 꽉 물어 댄다.

“흐….”

“힘 풀어, 응…. 그렇게 조이면 형 손가락이 아프잖아.”

친절한 척 달래듯이 말했으나 말의 내용과 달리 목소리는 탁하고 낮았다. 감출 수 없는 열기가 징그러울 만치 끈적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그는 말로 달래기를 포기하고 성마른 손길로 손가락을 늘려 구멍을 쑤셔 댔다. 피부는 찬 바람을 맞아 시원했는데 뱃속은 입안처럼 뜨거웠다. 아까 울 것처럼 헐떡인 탓에 오른 열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한계였다. 당장에라도 이 좁고 뜨거운 구멍에 제 성기를 묻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턱 근육에 힘이 들어갔다.

“흣, 흐… 읏, 혀, 형…. 조금, 천천히, 흣….”

다급하고 능숙하지 못한 손길에 자현이 괴로운 듯 허덕이며 애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밀어 내는 것도 아니었다. 목걸이도 했음에도 형을 건드리면 다칠까 싶어 손으로 어깨쯤의 옷자락을 쥐는 게 전부다.

그런 행동이 흥분을 더욱 부추긴다. 어떻게든 해 버리고 싶다는, 폭력성에 가까울 정도의 충동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는 밭은 숨을 뱉는 자현의 입에 입술을 붙이고 혀를 엮으며, 예고도 없이 가이딩을 쏟아부었다.

“……!”

평소에도 견디기 힘들어하던 ‘기분 좋아지는’ 가이딩이었다. 그것도 평소 하던 것 이상의, 두 배는 될 법한 양으로 쏟아 냈다. 흥분해서 조절하지 못한 것이다.

안 그래도 달아오른 몸에 맞닿은 구강 점막으로, 심지어는 구멍의 점막으로도 직접적으로 임계점 이상의 자극이 쏟아져 들어갔다. 동공까지 커진 눈에는 초점이 어긋났고 입이 입으로 막혀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덜덜 떨었다. 권경우의 옷을 쥔 손에도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이 꽉 들어가 있었다.

그는 자현의 반응에 정신을 차리고 미간을 구기며 입을 떼어 내며 구멍에서도 손가락을 빼냈다. 그제야 자현이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고 늘어졌다.

“학…. 헉…. 흐으….”

“미안, 형이 좀 흥분했네. 미안해. 괜찮아?”

감은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히는 모습에 그는 자신을 타박하며 혀를 내밀어 눈물을 핥았다. 혀 돌기 몇 개만 겨우 적실 만큼 적은 양이 갈증을 자극한다. 미안하다고 속삭이면서도 뺨을 깨물고, 밑을 붙이고 싶어 안달 난 성기는 조금도 죽지 않았다.

그는 자현의 등과 뒷머리를 감싸안으며 뺨과 귓가에 쪽쪽거렸다. 착한 애인이자 형인 것처럼.

자현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분명치 못한 발음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니요, 읏…. 좋아요…. 좋았, 어요. 조금만 살살해 주면….”

하.

착해 빠진 애인은 귀여운 말만 뱉어 냈다. 하지 말라던 짓으로 괴롭혀서 눈물까지 났는데도, 화내긴커녕 좋다고 살살 해 달라고나 한다. 그렇게밖에 말할 줄 모르는 것처럼.

“아하…. 살살하면 좋아?”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이자 자현이 끄덕거리며 형을 마주 안았다.

어깨에 팔을 두르고 꼭 안기며 얼굴을 묻고 애처럼 구는 게 마음에 들었다. 원래도 귀여운 짓을 시간 가리지 않고 하던 애인이었지만 지금은 응석이 더하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백태건의 진실을 알아 버린 탓인가? 세상에 믿을 사람이 형 하나밖에 없는 듯이 구는 게….

뭘 해도 괜찮다고 받아 줄 것처럼 구는 것도 음습한 충동을 자극했다.

그는 흥분해 자현을 괴롭히지 않기 위해 웃음을 참으며 농담을 던졌다.

“이거야 뭐, 형이 주는 가이딩이 좋은 건지… 형을 좋아하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응? 형이 좋은 거야, 가이딩이 좋은 거야. 그는 자현의 귓불을 빨면서 그리 새롭지도 않은 농지거리를 속삭였다.

“…….”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 놓고서 긴장했는지 자현은 말수가 줄고 몸이 굳었다. 힘을 빼라고 달랬으나 손가락도 꾹꾹 물어 대는 밑이 바로 성기를 받아들이긴 어려워 보였다. 그동안 몇 번 늘려 줬음에도 그랬다.

그는 찔걱거리는 짓을 멈추고 젖은 구멍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자현의 다리를 양쪽 팔과 어깨에 걸쳐 둔 채로 상체를 가까이 기울이고 말했다.

“혼자 만져 봐. 긴장 풀게.”

그렇게 말하며 자현의 손을 끌어다 스스로 성기를 잡도록 했다.

“…제가요?”

“왜, 혼자 안 만져? 자위 정도는 할 거 아냐.”

“그건….”

“설마 할 거 다 해서 혼자서는 안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뇨, 가끔씩 했어요. 남들처럼요.”

그렇게 말한 자현은 곧 자신의 상식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신감 없는 말투로 “…아마도요.” 하고 덧붙였다.

“해 봐, 그럼. 평소에 하던 대로.”

그렇게 요구하자 자현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낯으로 눈을 굴렸다. 그럼에도 싫단 말은 하지 않았다.

“음….”

조금 힘이 들어갔지만 아직 말랑한 성기를 손에 쥔 자현이 조심스레 그걸 만지기 시작했다. 어색한 손놀림이었다. 젤이 묻은 손으로 기둥을 쓸어 올리자 잘생긴 성기의 붉은빛이 진해지고 금방 부피를 키웠다. 예민한 반응이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더운 숨이 섞인 목소리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없었다. 자현이 애써 다른 곳을 보던 눈동자를 돌려 형을 올려다보았다. 도와 달라는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권경우는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굴었다. 대신에 벌써부터 요도구에서 프리컴을 방울방울 흘려 대는 성기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자현이 엄지손가락 끝으로 요도구를 꾹 누르며 문지르자 투명한 물이 손을 적실만큼 새어 나왔다.

“글쎄. 나도 누가 자위하는 걸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

별 소득 없는 대답에 자현은 눈을 내리깔고 귀두 끝을 쥔 채 요도구를 좀 더 거칠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거기서 많이 느끼는 건지 내뱉는 숨이 떨린다. 권경우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낮춰 말했다.

“물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 다 젖겠네.”

그러자 자현이 또 자신감 없는 눈치로 웅얼웅얼 변명했다.

“원래는 안 그랬거든요…. 근데… 형이랑 할 때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백태건 아래의 에스퍼 교육 과정에는 가이딩을 위한 성관계 중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드는 방법을 가르치기라도 하는 건가? 자현이 가이딩을 위한 관계를 거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시키거나 의도한 건 그 인간일 테니까. 그 변태 같은 늙은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만약 배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면 그것도 문제였다. 그는 이갈이 중인 동물처럼 깨물고 싶은 충동을 참아 내며 친절한 척 물었다.

“아하…. 그래. 혼자 형 생각하면서 만진 적은?”

그 질문을 듣자 자현이 바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런, 그런 짓은 안 했어요.”

“왜, 애인이잖아. 애인 사이에는 당연한 거야.”

“그래도….”

“그럼 지금 하면 되겠네.”

그렇게 말한 권경우는 자현이 잡고 있는 성기의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투명하고 미끈한 액체를 흘려 대는 촉촉한 점막이 손가락에 살짝 달라붙는다. 그 느낌만으로도 인내심이 뭉텅 깎여 나갔다.

죄라도 짓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던 자현이 이내 다시 자위를 이어 나갔다. 방금 전보다 더 달뜬 숨을 내뱉으면서 눈을 자꾸 피한다.

“하아, 하….”

“…형 생각하면서 해. 형이랑 야한 짓 많이 했잖아.”

낮고 다정한, 부드러운 속삭임을 들으며 자현이 눈을 감고 발가락을 오므렸다. 눈꺼풀과 속눈썹이 완전히 덮인 채 파르르 떨렸고 콧등과 입가도 움찔거리며 힘이 들어갔다.

“흣….”

만져 줬을 때는 금방 싸더니 혼자서는 자주 안 한 모양인지 영 서툴고 사정도 느리다. 그는 옆에 대강 던져 둔 넥타이를 주워 자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형이 손으로 자현이 배도 만지고 앞도 만져 줬었잖아. 손가락으로 구멍도 만지고, 안에 넣어서 내장 속도 문지르고… 벌려 주고.”

매끄럽지 않은 넥타이 표면으로 귀두와 요도구를 비비며 끙끙대던 자현이 감았던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물기 어린 눈동자로 형을 쳐다보며 본능적으로 더 큰 쾌락을 위해 허리를 얕게 들썩였다. 권경우의 어깨와 팔에 걸쳐진 허벅지가 바짝 조여들었다.

“읏… 아….”

짧은 탄식과 함께 흰 액체가 넥타이를 더럽혔다.

자현은 자위 한 번에 탈력감에 젖어 늘어졌다. 경계심 없이 흐려진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형을 올려다봤다. 생리적으로 고인 눈물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권경우는 그렇게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아플 정도로 발기한 제 성기에 대강 젤을 바르고 바로 구멍에 좆 끝을 맞췄다. 사정해서 열에 들뜨고 물러진 몸을 접히도록 누르고 허리를 안아 좆을 박아 넣었다.

“……!”

아까보다 확실히 부드러워진 구멍이 간신히 성기를 받아들였다. 좁은 곳을 비집는 압박감에 성기가 아플 지경이었으나 아까처럼 긴장해 씹어 대는 느낌은 아니었다.

“학…! 욱….”

따끈하고 축축한, 부드러운 내벽이 벌어져 성기를 빨아들이듯 감쌌다. 두꺼운 핏줄까지 징그럽게 선 부푼 성기가 팽팽히 벌어진 구멍을 파고들었다. 버거운 듯 벌벌 떠는 근육의 경련이 느껴졌지만, 가득 담긴 좆을 우물대며 자극하는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압박으로 인한 통증 따위는 이제 쾌감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었다.

자현은 배가 꽉 차 장기가 밀려 올라가는 느낌에 목 너머로 욱욱거리면서도 몸에 힘을 풀려 애썼다. 갑작스레 몸이 접히고 짓눌려 삽입 당하는데도 버둥거리긴커녕 발발 떨며 얌전히 받아 주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권경우는 폭력적으로 굴지 않기 위해 급히 입을 맞췄다.

형이 하는 짓을 다 받아 주던 자현은 조금 뒤 흠칫 떨며 그의 어깨를 잡고 키스를 피했다.

“헥, 헤윽…. 혀, 형, 잠, 잠깐… 기다….”

“기다려?”

자현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못 견디겠는 듯이 허리를 뒤치고 움칠움칠 밑을 조이며 낑낑거렸다. 권경우는 그게 저를 꼬시는 행동이 아님을 스스로 주지시키며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 냈다.

“얼마나 기다려. 이러고 한 시간 정도 있을까?”

혼란스러운 것처럼 눈을 굴리던 자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괜찮….”

간신히 말했으나 달뜬 숨이 섞여 나와 말을 끝맺기 어려운 듯했다. 권경우는 착한 아이에 대한 칭찬의 의미로 뺨에 쪽쪽대며 뽀뽀했다. 허리 밑 사정은 그다지 부드럽지도 친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힉….”

그는 자현의 어깨 위를 짚어 가두듯이 안은 채로 성기를 한 마디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배 속에서 젖은 내벽이 벌어지며 쪽, 찌걱 하는 음란한 소리가 피부를 타고 고막으로 직접 들어온다.

“흐악, 아…! 학……!”

순간 자현의 눈에 초점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벌어졌다 오므라든 발가락과 발등도, 형의 옷자락을 잡은 손도 희게 질려 덜덜 떨리고 있었다. 크게 뜬 눈에 혼란이 가득했다. 방금 겪은 느낌을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 이거, 이상… 흐으….”

“이상해? 어디가… 어떻게 이상해.”

권경우는 반사적으로 자현의 말에 친절히 대답하며 허리를 물렸다. 하지만 그건 그저 착한 척하는 말투가 입에 붙었을 뿐이었다. 그는 물렸던 허리를 다시 쿡 밀어 넣으며 자현의 속을 천천히 느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 폭신하게 느껴지는 내벽이 좆을 빨며 그를 흥분시켰다.

“넣, 으면서 가이딩, 하, 안, 안 돼, 이상… 헥…. 흐에….”

할딱대던 자현이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신음을 토해 내며 뭐라 설명하려 들었다. 그제야 그는 문제를 이해했다. 아닌 척하고 있었으나, 머리가 돌 정도로 흥분한 탓인지 저도 모르게 가이딩이 새어 나간 것이다.

정신을 완전히 놓고 박아 댄다면 조절이고 뭐고 진탕 쏟아 낼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현의 반응이 과했다. 그동안 많이 ‘연습’을 했음에도 몸 안쪽에 깊숙이 닿은 점막으로 느껴지는 건 차원이 다른 모양이다. 연습하기 전처럼 어쩔 줄 모르며 입이 벌어지고 숨쉬기 어려워하며 초점이 나갔다. 에스퍼의 목숨 부지를 위해 각인된 생존형 쾌락에 성감까지 더해지니 임계치를 넘은 모양이다.

하지만 힘들어할 뿐이지 객관적으로 나쁜 상황은 아니다.

“가이딩 효율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은데….”

점막 접촉을 위해 교접하는 구시대적 방식이 오래 이어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아…?”

“자현이 몸이 자꾸 형 거 달라고 빨아들여서 그런 거야.”

자현이가 형을 많이 좋아해서.

그는 일상적인 가스라이팅을 하며 허리 짓을 멈추고 물었다.

“많이 힘들면 조금 쉬었다가 다시 할까?”

자현이 고개를 저었다가, 성기를 더 밀어 넣자 고개를 끄덕인다. 권경우는 웃으며 간지럽히듯이 되물었다.

“어떻게 하라고?”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 했는데 자현은 벌써 탈진한 듯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눈꼬리에 고인 눈물 몇 방울이 흘러 베개에 스며들었다.

“아파?”

입술을 달싹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말이 잘 안 나오는 듯 색색거리다가 덜덜 떠는 손으로 형의 목을 감싸안았다. 싫지 않다는 뜻이겠지만 그는 확실히 하기 위해 속삭였다.

“기분 좋으면 좋다고, 싫으면 싫다고 말해야 돼. 직접 하는 건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말 안 하면 형이 오해할 수 있거든.”

“처음, 이요? 뭐가….”

“싫거나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 화를 내거나. 그래야 나도 정신 차릴 테니까.”

그러자 자현이 다시 고개를 저어 가며 간신히 말했다.

“아뇨, 아뇨…. 다, 다 좋아서….”

“응.”

“다 좋은, 좋은 것 같은데…. 기분이 너무, 좋아서? 이상해서…. 그래서….”

“그래? 다행이네. 그래, 어떻게 할까.”

“그냥….”

“그냥?”

“그냥 형 마음대로….”

마음대로 해도 돼요.

권경우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입술로 자현의 턱선을 지분대다 목에 걸린 목걸이에 가만히 입술을 댔다. 그는 흥분을 감춘 즐거운 어조로 속삭였다.

“최악의 답을 골랐네.”



자현이 사라진 건 다음 날 밤이었다.


***


오전에 잠에서 깼을 때만 하더라도 별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괜찮겠어?”

“저 컨디션 완전 좋아요. …보기엔 좀 그렇지만.”

비록 겉모습은 영혼을 뜯어 먹힌 것처럼 상태가 좋지 못했지만 가이딩을 양껏 받아서인지 몸 상태는 괜찮은 것 같았다. 그는 부르터서 붉은 기가 가라앉지 않은 자현의 눈가에 얼음팩을 대 주며 혀를 찼다.

“오후에 나가려고 했는데 이래서는… 쯧. 누가 그랬어?”

자현은 그 말에 그를 지목하듯이 쳐다보다가 웃음을 흘렸다.

“진짜 괜찮아요. 저 금방 낫잖아요. 이거 가지고 엄살 부리기는 좀 그렇죠.”

어제보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 듯한 모습이다. 초연한 태도는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인 사람 특유의 해탈함처럼 보이기도 했다.

“근데 오후에 어디 나가는 거예요?”

“말했잖아. 형이 자현이 가고 싶었던 곳 데려가 준다고.”

“아.”

“오늘은 가까운 데로 가고, 다른 곳에는 나중에 또 가면 되니까.”

놀이공원 얘기임을 알아들은 자현이 미소 지었다가 이내 곤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희 그럼… 거기서 5번 하는 거예요?”

“5번?”

“형이 원래 이거 하루에 세 번 하는거라고…. 근데 놀이공원 가면 시간상 거기서 해야 되는 거죠?”

권경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일부러 성적 상식을 망쳐 놓은 것은 저였기에, 새삼 후회나 양심의 가책 따위를 느끼는 건 아니었다. 다만 저 같은 인간에게 잘못 걸린 권자현의 불운을 애틋해할 뿐이다.

“한 번에 많이 하면 세 번까지는 안 해도 돼.”

“아, 그런 거예요? 아하….”

“그래.”

“다행이다. 놀이공원에서 또 하는 줄 알고 좀 걱정했거든요. 제가 소리 잘 참는다고 했었잖아요. 근데 어제 해 보니까 솔직히 자신이 없어져서요… 못 참을 거 같은데… 들킬까 봐.”

“…….”

“그래서 혹시 만약에 하게 되면, 차에서 하면 안 되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놀이공원에서도 안 하고 차에서도 안 할 테니 걱정 마.”

“진짜요?”

“그래. 너 좋으라고 가는 건데.”

그의 말을 들은 자현은 한동안 시선을 돌린 채로 침묵하더니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권경우는 그런 자현의 뺨을 쓰다듬다 붉은 기가 남은 눈가를 엄지로 쓸었다. 얼음팩 때문에 묻은 물방울들이 침실에서의 기억을 연상시켰다. 물이 많은 건 아래뿐만이 아니었다. 심하게 느끼면 눈물이 나는 체질인 건지, 하는 내내 눈가가 물기로 가득했었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말에 약 먹은 것처럼 발정이 나서 그렇게 괴롭혀 댔으니…. 상황이 좋지 않아 몇 번을 미뤘던 탓에 인내심이 다했던 건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걸 겪었으니 발정 난 애인이 시도 때도 없이 박으려 들까 봐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걱정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꽤나 참고 있었으니까.

“질리면 좀 덜하게 될 테니까 참아 봐.”

“질려요?”

“그래. 내 말은….”

그는 적절한 말을 찾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네가 형이랑 하루에 몇 번씩 하기로 한 것도, 질릴 때까지 하고 나면 횟수를 줄일 테니 많이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고.”

권경우는 그렇게 말하며 자현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뗐다. 마음 같아서는 버드 키스 정도가 아니라 당장 다시 눕혀 어제 하던 짓을 이어 가고 싶었으나, 빨리 좋아하는 장소에 데려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욕망이 욕구를 이겼다.

“이제 나갈까? 가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그는 자현의 손을 잡고 현관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자현은 바로 따라오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형, 저 3번… 안아 주시면 안 돼요? 가이딩 말고 그냥요. 집에서 나가기 전에….”

무슨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또 어리광이다.

“안아 줘?”

그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되물으며 자현을 안았다.

아버지 같은 분인 줄 알았던 쓰레기에게 배신당한 탓인가? 형 노릇을 해 주겠다 말한 건 잘한 선택이었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니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는 거겠지.

앞으로는 아비라 자칭하던 징그러운 늙은이의 흔적을 자현에게서 천천히 지워 나갈 것이다. 상식이든 훈련이든 에스퍼 활동이든 전부 다 새로 가르쳐서 머릿속에 형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할 일이 무척이나 많다. 메시아 프로젝트는 엎어 버리면 자현이 실망할 테니 이왕이면 몇 년 더 공들여서라도 비슷한 걸 완성해 DH 산하 재단의 것으로 발표할 것이다. 꽁꽁 숨겨 둔 부지에는 오라클이랍시고 이상한 건물이 하나씩만 있을 뿐이라 완전히 새로 해야 할 성싶었다.

그리고 이후에 배신의 충격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더라도 지금 같은 어리광쟁이로 남게 하고 싶었다. 형 말이라면 뭐든 다 믿고 귀엽게 굴려 노력하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살살 구슬리면 통할 게 분명하다.

“얼마나. 이러고 한 시간 정도 있을까?”

그는 섹스할 때 했던 말을 똑같이 속삭이며 더 깊게 안았다. 자신이 씻겨 말려 준 머리카락과 귀에 입술을 붙이며 몸을 섞었을 때보다 깊은 충족감을 느꼈다.


***


숲속을 뛰다시피 걸었다. 나는 약간 지쳐 있었다. 공항을 통하지 않고 여기까지 오는 건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만도 갑자기 통제 인원이 엄청 늘어 있어서 다른 루트를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는 내 발로 뛰다가 중간에 무인 트레일러와 화물차 등에 숨어 이동하며 잠시 눈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잠은 거의 못 잤다.

예전에는 온갖 험지나 게이트에서 끼니를 때우고 생활했기 때문에 침대가 있는 내 방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호사로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몇 달 정도 진짜 호사다운 호사를 누린 탓에 나는 많이 나약해져 있었다.

백태건은 내게 메시지를 보내며 마지막에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적절한 때에 신호를 주겠다고.

나는 그 신호가 뭔지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백태건은 혹시 필요하게 될지 모른다며 내게 비밀 메시지 수신법과 각종 신호들, 접선용 장소들을 외우게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런 걸 배울 필요는 없었다. 형이랑 같이 지내면서 상식이 많이 늘어서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8시쯤, 베링해 근처에 콜업이 떴다가 약 30분 뒤 사라졌다.

드물지만 있는 일이었다. 불안정 게이트로 판단된 게이트가 다시 안정권을 찾았을 때라거나. 그러면 강제 소집된 에스퍼들은 투덜거리며 다시 복귀하는 거다. 그리고 그 콜업 발동 시스템은 UNGRA에서 관리했고, 그 시스템의 백도어 중 하나를 백태건이 갖고 있었다.

어쩌면 하나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내가 알고 있는 건 그랬다. 그걸로 내게 신호를 보냈다. TV고 뉴스고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내가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방법으로.

호출 위치는 다름 아닌 메시아 프로젝트의 오라클 근처였다. 범죄에 사용될 듯한 낡고 작은 학교에는 오래된 태양광 패널로 동작하는 전등이 달려 있었지만 달빛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나는 먼발치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금속 지팡이로 땅을 짚는 소리와 함께.

“오는 길이 많이 힘들었니?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는구나.”

“…….”

나는 피곤했고, 굶주렸고, 옷도 그리 깨끗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태건은 거침없이 내게 다가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미안하구나.”

그는 가끔씩 나를 칭찬하곤 할 때 보여 주던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네가 들은 모든 것은 다 진실이다. 내가 했던 말들까지 전부. 아니라고는 하지 않으마. 전부 사실이니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충격이 많이 컸을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를 아주 잘 키워 내서 훌륭한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는 마음도 진심이었다. 그걸 위해 너를 힘들게 한 만큼 내 삶을 쏟았고. 비록 뒤에서 거칠게 말했을지언정 뜻은 그러하지. 객관적으로 잘 생각해 보렴.”

“…객관적으로.”

객관적이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거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을 거다.

“네 부모님, 가족들. 과거의 사건들. 그 또한 내가 한 짓이 맞아. 하지만 그 정도의 일을 나 혼자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네가 먹은 초콜릿에 적힌 글자를 떠올려 보렴.”

모르겠다.

나는 그런 걸 판단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장관님이었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준비해 온 말을 꺼냈다.

“먼저 메시지로 들려주셨던 녹음 파일 전체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권…대표님이 오래전부터 준비했다는 계획들도요.”

백태건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그놈을 믿고 싶은 눈치 같구나. 하긴, 아주 철저한 인간이니 보통이 아니었겠지. 네게 많이 잘해 줬니? 다정히 굴고?”

“…….”

“어디든 같이 다니고, 식사도 항상 같이하고,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안아 주기도 했어?”

나는 거의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백태건은 그런 나를 붙잡지 않고 조용히 설명했다.

“거기에 넘어간 건 네 잘못이 아니다. 내 잘못이지. 내가 너를 너무 엄하게 키워서 그런 거야. 건강히 키우기 위해 단 것을 절대 주지 않았더니 남이 주는 싸구려 사탕 하나에 넘어가 버린 게지. 너무 자책하지 말렴.”

싸구려 사탕.

형이 나에게 해 준 것들은 싸구려 사탕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나한테는 처음이었던 그 모든 일들이 형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겠지. 머리가 아플 거야.”

백태건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실제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가 들려주는 증거들을 모두 다 듣고 난 뒤에 결정해도 된다.”

“…….”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을 테지만, 마음먹을 계기는 확실히 주어져야 하지 않겠니. 따라오렴.”

백태건은 그렇게 뜸을 들이며 몸을 돌렸다. 나는 바로 따라가는 대신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말했다. 마른 입술 사이로 쉬어 버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얘기부터 먼저 듣겠습니다.”

“그래, 알겠다. 나를 여기서 이만큼 기다리게 해 놓고서는 정작 네가 듣고 싶은 건 빨리 말해 달라 성화구나. 가면서 얘기할 테니 따라오기나 하렴. 여기서 오래 머무르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야. 녀석이 벌써 이 근처에도 사람을 보내 놨거든.”

사람을 보냈다니 설마….

“권 대표가….”

“그래. 오라클 근처에 말이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네 꼬리가 길어 금방 밟힌 건지.”

그가 오라클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밖에.

내가 형을 데려와 직접 보여 주고, 신나서 주절대며 그곳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했는지 실컷 떠들었으니까. 형은 수색 리스트에서 오라클을 우선순위에 배치했을 것이다. 하지만 백태건은 내가 그렇게까지 멍청한 짓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후자라 해도 책망하는 건 아니니 걱정 말렴. 보통 여우 같은 녀석이 아니니,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기도 했고….”

백태건은 나를 쳐다보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거리를 두고 그를 뒤따랐다.

“대단한 놈이야.”

“…….”

“그 녀석은 자기한테 가이드 능력이 있다는 걸 무척 싫어했거든. 에스퍼건 가이드건 다 혐오했지. 이능력을 없애는 방법을 개발하려 들 정도로 자기 능력조차 끔찍하게 싫어하던 녀석이 계획을 위해 너와 그 정도로 부대끼다니…. 지독한 녀석이야.”

백태건은 형이 내게 직접 가이딩 해 줬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나도 말하지 않았었고 DH에서 약과 아이템, 다른 가이드들을 이용해 케어 받아 지금처럼 상태가 좋아진 것으로 전달했다고 들었다. 백태건이 그 말을 의심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형은 그 모든 걸 싫어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렴, 손 닿는 것조차 역겨운 상대와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친밀히 굴고 안아 주기까지…. 대체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는지 궁금하지 않던?”

그거보다 훨씬 많은 걸 했다. 형은 내 애인이자 가족이 되어 주기로 했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좋은 말들도 많이 해 줬다. 애인이 되면 해야 한다는 것들도 다 했다. 솔직히, 그게 다 거짓이고 연기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떠올려 보면 힌트가 없는 건 아니었다. 형은 종종 가이딩 때문에 자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말을 했었다. 날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리기도 했고.

차라리 나한테 해 주던 모든 것들이 형한테는 별거 아닌 적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가 더 나았다.

목적을 위해 내게 맞춰 주며 참고 견딘 거라면, 나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할, 이유라는 게….”

가슴이 또 쥐어짜이는 듯이 아파서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며칠 내내 나는 이 고통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 누군가 갈비뼈 사이로 칼을 꽂아 비트는 느낌. 나도 모르게 가슴팍을 더듬거릴 정도로 생생하고 적나라한 통증이었다.

하지만 부상을 입었을 때와 달리 엔돌핀과 아드레날린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아파서 숨이 막힐 뿐이다.

가슴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건가? 원래 이렇게 아픈 건지, 아니면 나만 유독 고통스러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배우지 않은 상식을 물어볼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없어졌으니까.


***


얼마 전의 대화였다.

“자현아.”

“네?”

“일하는 거 재미있어?”

“저 일하는 거… 헌터 일이요?”

“그래.”

“재밌어요. 왜요?”

“재밌지만 힘들잖아. 어제도 많이 피곤해했고.”

형이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나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자현의 뺨을 만지며 권경우가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질 낮은 발언을 했다.

“의무적으로 하루에 세 번씩 해야 하는데, 애인이 일 나가면 다쳐서 오니 시간이 안 나잖아.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형의 희롱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자현이 애인의 의무를 어떻게 다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떡하죠?”

“글쎄?” 하고 권경우는 뜸을 들이다가 방금 막 떠올린 것처럼 운을 뗐다.

“만약 나중에 너 말고도 너처럼 강한 사람이 많이 생겨서, 굳이 네가 다 떠맡지 않아도 충분하다면 어떨 것 같아.”

“어…. 그럼, 제가 형 경호라도 할까요? 수행원? 저 그런 거 잘하잖아요.”

“흠…. 그거 말고 더 어울리는 게 있을 텐데.”

“뭔데요?”

“뭐라고 해야 할까…. 형한테 뽀뽀하면 열 장씩 받는 직업은 어때.”

진중하게 형의 말을 경청하던 자현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예?”

“한 시간에 최소 한 번. 형 무릎에 앉아 있으면 분당 한 장씩.”

“…….”

“배 만지게 해 주면 한 장, 귀엽게 애교 부리면 다섯 장. 다른 것도 쳐 줄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의 자현이 눈을 굴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의 손을 끌어다 제 웃옷 아래로 집어넣어 배를 만지게 하며 말했다.

“무급으로 해도 돼요. 저 돈 많아요.”

권경우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손도 웃옷 속에 넣어 주물럭거리다 자현을 쓰러트렸다. 아랫배에 입술을 문지르고 깨물고 빠는 시늉을 하자 자현이 킬킬대다 간지러운지 몸을 웅크렸다.

“후회할 텐데? 지금 벌써 여섯 장 적립됐거든.”

“여섯 장? …제가 방금 애교 부린 거라고요?”

‘너 말고도 너처럼 강한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이 말은 ESP 추출기의 완성을 가정하고 한 말이었다. 백널 게이트 연구의 목표는 ESP 추출기를 만드는 것. 제게서 가이딩 능력을 없애기 위해 시작했던 프로젝트였으나 궁극적으로는 이능력의 복사나 이식의 가능성을 알아내기 위한 연구이기도 했다.

권자현을 실험에 투입하기를 망설이다가 결국 그를 쓰지 않기로 판단하면서 무기한으로 미루게 된 상태였다.

하지만 연구를 포기하진 않았다. 오히려 홀딩을 풀어 계속 진행하게 만들었다. 노지연 본부장은 황당해했으나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유를 묻는 노지연의 질문에 권경우는 명확히 답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어처구니없는 이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권자현이 혼자 그 많은 일을 하게 놔둬야 하나?’

UNGRA 특임관이라는 직위는 이미 공고히 다져져 전 세계 헌터들에게 헬퍼 같은 이미지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의 뼈를 갈아 만든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일을 줄인다고 하면 오히려 반발이 발생하겠지. 본인도 불안해서 못 견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혼자 위험한 것들을 떠맡게 하는 대신 차라리….

옳지 않은 생각인 건 알고 있다. 당사자도 원치 않을 테고. 만일 추출 과정에 능력 손실이 발생한다면… 상당히 슬퍼하겠지. 할 줄 아는 건 몸 쓰는 것뿐이니 능력을 잃는다면 전업 애인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백태건의 진실을 알게 된 자현이 우울해하기 전까지는.

자현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보다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자현에게서 백태건을 완전히 떼어 내 버리고 제게 의지하게 만들 수 있음에도, 그 사실에 기뻐하지 못할 정도로.

만약 프로젝트가 성공해 백널 게이트의 연구 없이 ESP 추출기가 완성되더라도 자현에게 그 기계를 들이대진 못할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다.

자신은 감정에 휘둘려 판단을 여러 번 번복하는 멍청이가 되어 버렸으며 원래대로 돌아갈 길은 없어 보였다. 남은 건 그 비가역적인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가족도 가짜 아버지도 친구도 뭣도 없이 홀로 남은 권자현은 애인이 아무리 비열하고 저급하게 군다 한들 곁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늦은 저녁, 자현은 놀이공원을 다녀와서 씻고 오겠다고 안으로 들어갔었다. 조금 오래 걸린다고는 생각했다.

또 형이랑 야한 걸 하는 줄 알고 열심히 씻고 있나? 가서 좀 도와주며 앞으로는 씻는 것도 형이랑 해야 한다고 가르쳐 볼까, 하는 생각 따위를 하던 참이었다.

그리고 그 쪽지를 발견했다.


콜업 다녀올게요.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먼저 주무세요.


그 따위 것을 믿고 먼저 잠든 건 아니었다. 그는 별거 아닌 듯이 보이는 쪽지의 내용을 한 번 더 읽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었더라도, 직접 말하는 대신 이런 글자 몇 개만 써 놓고 가 버린다고? 그것도 이런 평온한 문장으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안의 쪽지를 구겨 버렸다. 다시 펼쳤지만 이미 구겨진 종이의 글자를 노려보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는 자현이 몸 쓰는 것 말고는 귀여운 애인 노릇밖에 못할 거라 여겼던 과거의 판단을 철회해야 했다. 그 애는 철저히 훈련받은 요원답게 흔적을 감추고 움직였다. 휴대폰의 마지막 위치는 당연하다는 듯이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체 왜?

바로 어제도, 몇 시간 전까지만 하더라도 형을 사랑하고 좋아한다던 애가 갑자기 떠날 만한 이유 같은 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협박이라도 당한 건가?

아니면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고등급 게이트를 처리하기 위해,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이런 짓을 벌인 건가?

피어-니터에 다녀온 이후 자현이 또 다칠까 게이트 얘기를 할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자현이 뭘 갖고 가기라도 했는지 알아내려 방 안과 드레스룸을 거칠게 뒤졌다.

20여 분 뒤, 보고가 들어왔다. 콜업의 이상 신호가 전 UNGRA의 국장인 백태건에게서 나왔을 것이라 추측된다는 내용이다.

권자현은 백태건에게 간 것이다.

백태건이 위험에 처했을까 걱정하던 권자현은, 그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서도 그에게로 갔다. 형이라고 부르던 자신을 속이고 마치 금방 돌아올 것처럼 거짓말까지 해 가면서.

그는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드레스룸 가장 안쪽에 놓인 서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곧장 다가가 맨 아래 칸을 열었다. 텅 비어 있다. 거기에는 자현의 옛날 옷들을 보관해 두었었다. 제가 준 것이 아닌, 보기에만 그럴듯했던 형편 없는 의복 장비들. 장관에게 종속되어 있던 시절의 흔적.

권자현은 자신이 준 것들을 놔두고 그걸 입고 갔다.

그는 서랍을 으스러트릴 듯이 세게 쥐며 조소가 섞인 한숨을 뱉어 냈다.

“하….”

혹여나 자현이 어떤 약점이라도 잡혀 백태건에게 간 건 아닌가 생각한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왜?

자신을 키워 준 가짜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서? 나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제 앞에서는 놈에게 정을 뗀 것처럼 굴더니, 자신이 들려준 증거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이라도 했던 건가? 아니면 그 모든 걸 감수하고서라도 벗어날 수 없을 만큼 깊은 감정으로 매여 있던 것인가?

제아무리 역겨운 비밀을 숨기고 기만했더라도, 결국 손 내밀면 그 손을 잡아 버릴 그런 마음이었던 건가.

그는 제 앞에서 백태건에 대해 말하던 자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애정은 그리 크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것마저도 머저리가 된 자신의 착각이었을지 모른다.

자현에게 있어 만난 지 얼마 안 된 자신보다는 백태건이 더 중요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떠오르는 건 그리 이상하지 않다. 아무리 저를 좋아해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굴어도 그건 처음부터 거짓된 감정이었으니까. 속여서 주입시킨 가짜 짝사랑으로 시작된 감정, 그것이 이제 와서 잘못 끼운 첫 단추처럼 느껴졌다.

권경우는 핸들을 거칠게 돌리며 가짜로 만든 애정에 배신감을 느끼는 자신을 비웃었다.

후회한들 과거를 바꿀 수도 없으니 달리 방법이 없다. 감정이 가짜였는지 진짜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결국 자현을 빼앗길 뿐이니 뭘 해도 상관없지 않나? 차라리 ESP 추출기를 완성한 다음 별것 아닌 검사라 속여 이능을 빼앗아 무력하게 만들어 버리고 싶다는 극단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뭐가 됐든, 먼저 찾아야 했다.

일단 잡아다 눈앞에 둬야 한다.

어둠을 뚫고 도로를 난폭하게 가로질러 온 세단이 공항 구석의 육중한 철문을 통과해 활주로 한복판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고무 타는 냄새를 내며 멈춰 선 차량 밖으로 나온 그는 전용기의 트랩을 성큼성큼 밟고 올라갔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도 전, 비행기 동체가 유도등이 점멸하는 활주로를 향해 미끄러졌다.

권경우는 최근 자현이 자주 입는 장비와 옷들 몇 가지에 위치 발신기를 달아 놨었다. 음습한 짓인 줄은 알았으나 딱히 고민하지도 않았다. 순진한 애인을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할까 봐 강박증에 걸린 인간처럼 굴었다.

자현이 다 버리고 갔기에 지금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이 되었지만. 그것이 우스웠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권자현은 과거를 입고 갔지만 단 한 가지, 자신이 준 물건을 들고 갔다. 마지막으로 사 준 검 한 자루. 그가 원래 쓰던 건 이미 으스러진 지 오래였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

그 검의 작은 장식에도 발신기가 달려 있다. 다만 초소형의 내구성 강한 것을 고르느라 발신 범위는 좁았다. 500미터만 멀어져도 신호가 끊기는 수준이었다.

자현이 백태건과 접촉할 만한 후보지는 열 곳 정도로 좁혀졌다. 그는 그중에 몇 군데를 꼽으며 직접 움직이겠다 통보했다.

더 빨리 이동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초조함을 느꼈다. 자현이 백태건과 만나기 전에 잡아야 한다. 백태건은 자신과 동류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죄를 고백했던 대화를 녹음해 갖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그리고 백태건은 자현을 만나면 그때 말했던 자신의 음성을 자현에게 들려줄 것이 분명했다. 그와 자신은 비슷하게 치졸한 인간들이기 때문에.

그는 신경질적인 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형이자 애인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안아 주고 예뻐해 준 건 의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자현이 혹여나 어디가 아플까 봐 전전긍긍하며 아까워 벗겨 먹지도 못하고, 애인이 귀여워 지능이 떨어진 멍청이처럼 굴게 되는 건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둘 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결국 권자현은 백태건에게 가지 않았나. 가면서도 자신에게 미움받지 않고자 거짓말했다. 그거 하나는 희망적이었다.

윽박지르고, 회유하다 안 되면 가이딩과 약물, 아이템 수급을 가지고 협박이라도 하는 수밖에. 형 말고는 아무에게도 가이딩 받을 수 없다 고백했던 건 거짓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기꺼이 그것마저도 인질로 삼을 수 있을 만큼 비겁하고 치졸한 인간이었다.

이건 사랑보다는 소유욕에 더 가깝지 않은가? 혹여나 자현이 백태건에게 이상한 말을 들어 저를 조금이라도 싫어하게 될까 두려워 벌벌 떨고 있으니 강박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현이 다시 제게 돌아오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가르치고 주입시켜 두 번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나가는 건 물론이고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 형에게 말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머릿속에 박아 넣을 것이다.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농담처럼 말했던 전업애인을 시키는 것도 방법이겠지. 하루 종일 형한테 몸을 내어 주는 ‘일’이나 시키다보면 쓸데없는 생각 같은 건 머릿속에 남지 않을 테니까.

그건 전부 다 권자현의 불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힘으로 억압해서 가두어 갖지 못해 추잡한 수나 떠올리는 인간과 엮인 불행.

오로지 자신만이 권자현의 마지막 불행이어야 했다.


***


자현이 사라졌던 그날, 낮의 날씨는 흐렸었다.

권경우는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선글라스에 마스크, 재킷의 후드까지 뒤집어써서 얼굴을 완전히 가린 모습. 안에는 품이 넓은 흰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었지만, 스니커즈와 후드 재킷으로 딱딱함을 중화해 그렇게 튀는 복장은 아니었다.

키가 크고 군더더기 없는 몸에 비율이 좋아 옷태가 무척 잘 받아서 얼굴을 감추고 나온 연예인처럼 보이는 건 문제였다. 후드 밑으로 드러난 피부는 보통 사람보다 훨씬 희었고, 마스크 주위 턱선이나 얼핏 보이는 콧대에서 느껴지는 유별난 잘생김은 숨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길이 가서 흘끗거리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정체를 짐작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멍하니 풍경을 보고 있던 남자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아직 거리가 그리 가깝지 않은 데다 주변이 소음으로 시끄러운데도 구분이 되는 모양이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권경우를 불렀다.

“형.”

“다 녹겠네. 빨리 먹어.”

그는 자현의 손에 들린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흘러내리는 표면을 긁어 올렸다. 아, 하며 숟가락을 들이밀자 자현이 머뭇거리면서도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입을 벌렸다.

반쯤 녹아 질척거리는 시원한 설탕과 지방질 덩어리가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자기가 사 놓고서 못 먹을 것을 먹는 듯이 애매하게 혀를 굴리는 모습에 그가 미소를 띠었다.

“이런 건 웬일로 먹고 싶어서?”

“그냥. 분위기에 어울리잖아요.”

초콜릿 아이스크림. 자현이 절대로 먹지 않을 법한 음식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놀이공원에 어울리는 간식이긴 했다.

맛은 봤지만 역시나 취향에 맞지 않는지 숟가락으로 크게 푹 떠서 형에게 내민다.

“형한테 짬처리를 하네?”

그는 가볍게 타박하면서도 그걸 받아먹었다. 달았다.

보는 눈이 없었더라면 이대로 입을 맞춰 도로 자현에게 먹이고 단내가 나는 혀를 실컷 빨았을 텐데. 그는 머릿속에서 오늘 밤 집에 가서 할 일 중 하나로 그걸 추가하며 입가에 짧은 미소를 걸었다.

“놀이기구 타고 싶었던 거 아니야?”

그러자 자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무슨 기구를 타든 직접 뛰는 것보다 느리니 재미가 있을 리 있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들뜬 목소리였다. 어딘가에서 비명 소리가 웃음소리와 뒤섞여 들렸다.

백태건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 자현은 급격히 우울해했으나, 권경우의 노력 덕인지 금세 나아졌다.

그리고 그동안 해 보지 못한 일들을 하고 싶어 했다. 형이랑 5번 하기도 그중 하나였으며, 놀이공원에 오기와 초콜릿 맛 디저트 먹기도 그것의 연장선이었다. 며칠씩 쉬어 가며 천천히 해도 될 텐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처럼 조급해했다.

자현이 어제 자신에게 부탁한 건 이거였다.

‘내일 놀이공원에 가는 거 있잖아요. 저희 둘만 있지 않으면 좋겠어요. 평소만큼은 아니어도 사람이 좀 있었으면 좋겠어요. 진짜 놀이공원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요.’

권경우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결국 자현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 눈을 마주하니 안 된다고 하기 어려웠다.

권자현은 몰랐겠지만 그건 놀이공원을 통째로 비우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자현의 기분을 나아지게 할 수 있다면 약간의 수고로움은 감당할 만했다.

그렇게 모종의 방법을 동원해 입장객을 줄인 덕분에 평소보다 한적했다. 혹여나 사진이나 소문 하나라도 새어 나갈까 모니터링도 철저히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권경우는 자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데 그리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슈트 대신 셔츠에 재킷을 걸치고 선글라스 하나를 쓴 게 전부다.

입장객도 통제했으며 그의 언론 노출을 막는 전담팀이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있는 남자 두 명의 정체를 알아챌 만한 사람도 없을 테고.

거의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쓰레기통에 넣은 자현이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두리번거리는 폼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도 사려고?”

권경우가 그렇게 묻자 자현이 손에 들고 있던 동물 머리띠를 도로 내려놓았다.

“…신기하게 생겨서 그냥 좀 본 거예요.”

그는 웃음을 참으며 방금 자현이 내려놓은 머리띠를 구매했다.

“신기하다며? 하나 가지고 가서 연구해 봐.”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자현이 멈칫한 사이 그는 자현의 후드를 벗기고 그 머리띠를 씌워 버렸다.

“모자 벗으면….”

“이러고 있으면 아무도 네가 너라고는 생각하지 못할걸.”

“그건…. 그래요?”

자현은 곧 형의 말을 믿고 머쓱하게 머리 위를 더듬거렸다. 머리띠는 흰 바탕에 검은색이 섞인 둥근 귀 모양이었고, 부드럽고 복슬복슬한 귀의 뒷면에는 특징적인 검은 반점까지 잘 그려져 있었다. 백호의 귀를 본 따 만든 듯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자현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잘 어울리네. 나중에 이걸로 DH 길드 마스코트라도 하나 만들면 되겠어.”

“마스코트요?”

“그래. 기업형 길드나 인지도 높은 길드들은 캐릭터를 만들어서 내세우기도 하니까. 잘 이용하면 우리가 권자현 헌터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킬 수도 있고.”

그는 혹여나 자현이 잘 모를까 싶어 설명을 덧붙였다. 그럴듯하게 말했으나 실제로는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 그래도 비즈니스적으로 활용도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자현이 형의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안 되는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머리 위에 달린 솜뭉치를 만지작거렸다.

“저는 좋지만, 그런 걸 해도 될까요? 제 특성 때문에….”

“좋지는 않겠지.”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면 좀….”

“하지만 그걸로 크게 마이너스 되지는 않을 거야. 네가 형이랑 지내면서 좋아진 능력치에 비하면 고작해야 1,2% 수준도 안 되겠지. 그것마저도 네 기분이 나아지는 걸로 상쇄될 수도 있고.”

“…….”

홀로 고립된 채로 고통을 참고 특성 유지에 목숨을 걸던 예전보다, 그와 함께 지내는 지금이 훨씬 낫다는 건 수치로도 명확히 드러났다. 단순히 모자란 가이딩을 충족시켜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긴장하면서 살지 않아도 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끝으로 자현의 귓가를 가볍게 쓸었다. 사람들이 많은 장소임에도 자현은 형의 손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신 눈을 감았다. 그의 손길을 느끼는 것처럼.

“…형이 말했잖아요. 기쁘고 행복할수록 제가 더 강해질 거라고요.”

“그래. 강해지고, 더 편안해지고, 덜 고통스럽겠지.”

“제가 기분이 풀려야 형한테도 좋겠네요.”

“그러니까 빨리 기분 풀어야겠지?”

능력치 연관과 별개로, 권경우를 위해서라도 자현의 기분이 나아져야만 했다. 냉랭한 분위기의 대외적인 이미지도 보기 좋은 편이었으나, 실제로 겪어 보면 속을 드러내고 솔직하게 구는 것이 더 어울리는 편이었다.

조금만 잘해 줘도 마냥 들떠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애처럼 구는 모습 말이다. 사소한 장난을 재미있어 하고, 별거 아닌 말에도 잘 웃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안아주는 것을 좋아하는 그런 모습들이.

아마도,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알지 못할 테지만.

“…….”

형의 답을 들은 자현은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보다 머리띠를 벗어 내렸다. 그게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품 안에 넣은 자현이 침묵을 지켰다. 날씨가 흐린 탓인지,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이었다.

괜한 말을 해 압박을 준 건 아닌지. 그는 이곳이 바깥이란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현을 끌어안았다.

“걱정 마. 금방 나아질 테니까. 나쁜 아저씨만 잊으면 돼.”

형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자현이 속삭이듯 대답했다.

“…아마 잘 안 될 거예요. 앞으로도 전처럼은… 안 될 거 같아요.”

권경우는 입을 열지 못했다.

“…….”

그건 명백한 미련의 표현이었다. 그 나쁜 아저씨를 잊지 못해 앞으로도 계속 슬플 것이라는 말. 상처가 영영 불행으로 남아 다시는 아무것도 모르던 행복한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고백.

그때 확실히 경각심을 가졌어야 했다.

권경우는 오늘로 벌써 세 번째로 탑승한 헬기에서 내리며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손짓하고 무어라 말하자 옆에서 건네는 약을 입에 넣고 물을 삼켰다. 그의 신체는 그저 운동을 좀 한 괜찮은 민간인 수준이었기에 피로와 수면 부족만으로도 신경질적인 머저리처럼 굴 수 있었다.

먼지 묻은 유리에 비친 남자의 꼴은 우스웠다. 초췌했고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자현이 좋아하던 근사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잠시 눈을 붙이는 대신 씻고 새 옷을 가져오게 해 갈아입었다. 혹시라도 형의 몰골을 보고 자현이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할까 봐, 구차하게 이딴 것에라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몇 번째인지 모를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머금었다.

백태건이 옳았다. 놈만큼은 아닐지라도 여러 겹의 덫을 만들어 잡아 뒀어야 했는데. 별것도 아닌 위치 발신기 따위나 달아 놓고 위안 삼는 대신 제대로 된 계획을 세워 놨어야 했다.

백태건을 치워 버리고 그 애를 빼앗기만 하면 다 해결될 거라는 멍청한 낙관은 어디서 나온 건지. ‘형 마음대로 해도 돼요.’라고 말하는 애인이 완전히 제 것이 된 줄 알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애가 울기라도 할까 봐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던 것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자현의 계획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혹여나 통제적이고 집착적인 애인이 제 발목을 잡을까 봐 방심시켜 뒀던 걸지도.

그러지 않고서야 떠나기 직전에, 그렇게 많이 사랑한다고 말할 이유 따윈 없었을 테니까.

<14. 그러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간다>




⁠⁠⁠⁠⁠⁠⁠⁠⁠⁣⁠⁠⁣⁠⁠⁠⁣⁠⁣⁠⁣⁣⁠⁠⁠⁣⁠⁣⁣⁠⁠⁠⁣⁠⁣⁣⁣⁣⁠⁣⁠⁠⁠⁣⁣⁣⁠⁠⁣⁣⁠⁠⁠⁠⁠⁣⁣⁣⁣⁣⁣⁣⁣⁠⁣⁠장관님… 백태건이 향하는 곳은 역시나 오라클 쪽이었다. 하지만 그쪽에는 이미 형이 깔아 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백태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고, 혹시나 형을 마주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다. 만약 날 잡으러 직접 온다면… 형을 마주치면 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이 대체 내게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나를 이용할 계획이었던 것과 별개로, 형은 백태건을 아주 싫어했고 나한테 가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멋대로 굴었으니 분명히 화를 내겠지.

나는 이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형이 내게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이건 그러니까 공포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그래서 두려웠다.

빨리 진실을 알아야만 했다. 초조함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뒤를 따라가던 나는 참지 못하고 그를 다시 불렀다.

“…장관님.”

“자현아.”

내가 입을 열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발걸음을 멈추고 운을 뗐다.

“네.”

“미나티아 쪽의 상태를 최근에 확인한 적이 있니?”

“권 대표님이 관리를 위임받아 계속 확인해 주셨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게 계약 조건이기도 했고요.”

“직접 본 적은?”

“…최근에는, 없습니다.”

불길함이 고약한 악취를 풍기며 넘실거렸다.

“혹시 권 대표가 네게 얘기했니? 백널 게이트의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걸. 손 쓸 수 없을 정도지.”

“…아뇨.”

내가 아는 것 중에 진실이 뭐가 있었을까.

“몰랐겠지. 몰랐을 거야. 알았다면 네가 이리 무책임하게 가만히 있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

“그 위험한 걸 두고서, 얼굴이 펼 정도로 먹고 놀기나 하다니. 권자현 에스퍼가 알면서 그랬을 리 없지. 그렇지 않니?”

“…예.”

“이리되면 결국 네가 다 뒤집어쓸 것을. 쯧쯔…. 권 대표가 대체 네게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나는 백태건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 내 눈은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추정하는 게 있으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나는 내 무지를 이실직고하며 그에게 부탁해야 했다. 알려 달라고.

“…죄송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가 있습니까? 대표님이 그런 짓을 일부러 할 만한 이유라는 게….”

아, 또 심장이 아팠다. 너무 아파서 도저히 참지 못하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사실 조금 알 것 같았다. 그저 형에 대한 내 감정이 그 생각을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설마, 그렇게까지는 아닐 거라 믿고 싶어서.

하지만 백태건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자현아. 놈들을 좀 유인해 주겠니.”

“네?”

그는 쇠지팡이를 들어 올려 땅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 다리로 놈들 사이를 가로질러 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네가 길을 내면 그사이에 나는 먼저 오라클에 들어가 있으마. 완전히 따돌리라는 말은 아니다. 보자… 20분 정도면 충분할 듯하구나.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나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백태건은 내 대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권 대표가 미나티아를 그렇게 만든 이유는… 곧 알게 될 거다.”

그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눈짓하더니 그대로 멀어졌다.

하긴 내 의지나 대답 같은 게 그의 앞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적은 없었다.

‘형은…. 형은 어떻게 했었지?’

형은 내 대답을 기다렸다.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형은….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백태건이 시키는 대로 인기척이 들리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들이 떠올랐다. 논리적이지 못한 부정적인 생각들. 최악이다. 그 생각들은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내 발목을 잡고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려 처박을 것만 같았다.

형이 언제부터 나를 속였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나를 이용하기 위해 지목해서 만난 관계였으니까. 그런 계약이었다.

형이랑 같이 지냈던 하루하루가 떠올랐다가 곧 다른 기억에 밀려 사라진다. 저녁마다 데이트 비슷한 걸 하면서 같이 밥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그때 먹은 음식들의 맛은 별로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때그때 형이 보여 준 표정이나 목소리, 공기의 냄새는 머릿속에 신기할 만큼 선명했다.

형은 가끔 테이블 위로 내 손을 잡기도 했다. 나랑 있는 시간을 늘리고 밤 늦게까지 아주 오래 나를 안아 줬다. 점점 많이 웃었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말씨를 내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좋았다.

가끔 전처럼 나쁜 말을 하고 화를 낼 때도 있었지만, 곧 수그러들고 미안하다고 했었다. 형도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한테 잘해 주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돼서 그러는 줄 알았다.

눈에 뻔히 보이는 그 노력들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나를 조금은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형한테 잘 보이려고 애쓴 게 조금은 도움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비틀거리면서 멈춰 섰다.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낡은 시멘트 벽에 손을 짚은 채로 허리를 숙여 속을 게워 냈다. 아무것도 못 먹은 지 좀 됐기 때문에 나오는 건 없었다. 위액 몇 방울이 수풀 위로 툭툭 떨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왜 내 몸이 이따위로 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무래도 계속 느껴 온 가슴의 통증을 멍청한 몸뚱이가 진짜 고통으로 착각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질질 흐른 침을 뱉고 손등으로 입을 문질러 닦았다.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고장 난 것 같았다.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을 하고 싶은 충동이 나를 짓눌렀다. 주저앉아서 웅크린 채로 눈을 감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머리를 쥐어뜯거나 팔이나 목을 긁고 싶었다. 지금뿐만 아니라 며칠 전부터, 계속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걸 안다. 나는 그런 걸 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백태건이 시킨 대로 사람들의 주의를 돌려놓는 건 쉬운 일이었다. 날 찾으러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가 있다는 티만 내면 됐으니까. 버려진 주택이 군데군데 남아 있고, 멋대로 자란 나무들이 무성한 이곳에서 들키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멀리 돌아 오라클로 향하는 길에서 내가 형을 만나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

형은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못 박힌 듯이 서 있었다. 몇 초, 아니면 몇 분쯤 그렇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형이 한 발자국 내딛자 나는 흠칫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형은 그대로 멈춰 섰다. 내 행동이 형을 충격에 빠트린 듯했다. 형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죄지은 듯 괴로워져 시선을 돌렸다. 무시하고 가야 하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물어볼 테니까 이리 와.”

초조하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 소리에 고개를 들자 형이 제자리에 선 채로 손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내 뒤에 절벽이라도 있는 듯 간절한 표정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손을 바라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돌아서지도 못했다.

“화내려는 게 아니야. 추궁하고 혼내려는 것도 아니고. 괜찮아. 응? 빨리….”

이번에는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나를 달랠 때 쓰던 목소리를 꾸며 내고 있었다.

“네가 장관님을 그렇게까지 걱정하고 있는지 몰랐거든. 형이 제대로 설명을 못 해 준….”

“대표님.”

겨우 정신 차리고 형의 말을 끊었다. 형은 환청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대표님?”

나는 형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백태건이 없는 이때가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미나티아 게이트.”

“…그게 왜.”

“그게 저희의 첫 번째 계약이었죠. 대표님께서 그걸 관리하고 후처리를 해 준다고 하셨었죠. 그 대가로 저를 드렸었고요.”

“…….”

나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수준의 계약서에다가 서명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에게 형을 비난할 권리 같은 건 정말 아예 없는 걸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형은 형 마음대로 나를 썼던 거니까.

“제가 계약을 깼으니까 그건 더 이상….”

그렇게 형을 끊어 내려던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내 뒤에서.

그건 사람 목소리 같았다. 라디오 주파수와 노이즈가 잔뜩 낀, 기계에서 나오는 사람의 목소리. 처음에는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작았던 그 소리는 형에게도 들릴 정도로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년 동안 관리 대상이던 미나티아 지역의 칼라비-Unstable Singularity Grade-7 게이트. 통칭 백널 게이트에서 발생한 이상 징후를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정황이 확인되어 관련 기관이 조사에 착수 중입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이게 뭐지. 환청인가? 왜 갑자기 미나티아 게이트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거지?

억지로 크게 키운 음량 때문에 듣기 싫은 잡음이 섞인 라디오 소리는 느린 속도로 점차 가까워졌다. 동시에 나는 발걸음 소리와 바닥에 닿는 지팡이의 소리도 들었다.

[내부 관계자의 제보에 따르면, 해당 게이트의 불안정성이 모종의 사고로 인해 악화되어 임계치를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인 은폐와 묵인을 해 온 것으로 주장되고 있습니다. 현재 백널 게이트는 인근 조사 기관에 의해 파장 등급 8레벨에 가까워진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를 관리해야 할 UNGRA 아시아지부는 지난 몇 개월간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취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그것이 내 지척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그 뉴스의 내용을 이해했다. 형이 잘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던 미나티아 게이트는 더 상태가 나빠졌고 나는 그것도 모른 채 방치하던 꼴이 됐다.

이건 내 책임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다른 방법은 없었다.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간에 미나티아 게이트를 처리하겠다고 내 발로 들어가는 수밖에.

지독한 트랩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윽고 내 뒤에 도달한 남자의 손이 어깨를 짚었다. 그의 다른 손에 들린 라디오 스피커에서는 여전히 지직거리는 잡음 섞인 앵커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흘러나왔다.

[…인근 지역은 대규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

“자현아. 아까 내가 그리 말했었지. 백널 게이트가 이 지경이 된 이유에 대해, 그리고 이 지경이 되도록 권 대표가 지금까지 숨겼던 이유에 대해 알려 주겠다고…. 이제 알 것 같니?”

[…특히 이번 사태는 얼마 전 갑작스레 자리에서 물러난 UNGRA 전 아시아 지부 국장이 연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현재까지 연락이 닿지 않고 있으며 정확한 소재 또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저히 형을 눈에 담을 자신이 없어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현장 실무 책임자인 특임관, 권자현 에스퍼가 고의적인 은폐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 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며,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으로….]

뭐라고 앵커가 길게 덧붙였으나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했다. 알겠으니 그만 듣고 싶었다.

형이 어떤 이유를 갖고 그런 짓을 했든 간에 결과는 이거였다.

우스운 생각이지만 그 게이트를 불안정하게 만든 멍청한 침입자들이 조금은 고맙게 느껴졌던 적도 있다. 그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형이랑 이렇게 엮이지 않았을 테니까. 형은 내가 필요하다며 나를 지목해서 계약의 조건으로 걸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처음부터였겠지. 머릿속에 수많은 부정적이고 고통스러운 생각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몸집을 부풀렸다. 나를 쓸모 있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 봤다고 말하던 형의 목소리가 속을 자꾸 찔렀다.

그저 아이템 개발 때문이라면 그렇게까지 내 힘을 키워 줄 필요는 없었을 텐데, 그러면 장관님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렇게 했던 걸까. 함정을 파고 내가 떨어지길 기다리면서. 하지만 나는….

나는 숨을 얕게 내쉬다가 구역질을 하는 것처럼 속에서 넘치는 말을 토해 냈다.

“…이렇게, 안 하셔도…. 저한테 사실대로 말씀하셔도… 됐을 텐데요. 그럼 제가….”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 이러지 않아도 나는…. 나는 형이 그렇게 해 달라고 했다면 무조건… 그게 뭐든지 따랐을 텐데.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고 상당히 멍청하게 들렸다. 난 멍청한 소리를 더 하기 전에 입을 꽉 다물었다.

도저히 고개를 들고 형을 볼 수가 없었다. 형의 표정을 보는 게 너무 두려웠다. 거짓말을 들킨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을까 봐. 아니면 공들인 계획을 들켜서 아쉬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거나. 그런 최악의 상황밖에 상상되지 않았다.

형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그게 나를 더 슬프게 했다. 차라리 무슨 소리냐며 화라도 냈으면 나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뒤돌아 백태건을 따라 발을 옮겼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이 빠르게 걸어가며 손등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누가 볼까 두려워하며 물기를 닦아 냈다.

그렇게 도착한 오라클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까 내가 유인한 탓도 있겠지만, 형 또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방해도 없이 오라클 안으로 들어온 나와 백태건은 벽 안의 황량한 부지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인 건물로 향했다.

건물 안은 무척 특이하게 생겼다. 예전엔 자연스러운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안다. 이 건물은 이상하다. 통로처럼 둘러진 계단과 가운데 바닥에 설치된 거대한 수정 모양 아티팩트가 보였다.

옛날에, 백태건은 저게 이 병원의 핵심 치료기가 될 거라고 설명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로 입은 피해는 일반 병원에서 고치기 힘드니까.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병실 같은 건 지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게 내가 버는 돈이 모자라서 그런 줄 알았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가다 입을 열었다.

“장관님. …백태건 국장님.”

그는 흥분한 듯 내 부름을 무시하며 걷다가 백태건 국장님이라 부르자 고개를 돌렸다.

“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희열에 찬 얼굴이었다. 욕망이 번들거린다. 처음으로 저 남자의 얼굴이 추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무감각하게 물었다.

“그런데, 미나티아 게이트의 상태를 고발한 내부 관계자는 누구였을까요.”

“…나를 의심이라도 하는 듯한 눈빛이구나. 내가 했다고 생각하니?”

백태건은 마치 내 생각을 존중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내 의견 따위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하든 백태건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

“그리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그건 권 대표의 짓이다. 생각해 보렴. 그렇게까지 함정을 파 놓았는데 네가 도망갔으니 급하더라도 마무리를 짓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

백태건은 나를 바보 취급하고 있었다. 뭐, 대충 비슷하니까. 이전의 나라면 그의 말을 믿었을 것이다. 이상한 점이 있더라도 내가 잘 몰라서 그랬겠지 하고서.

그러니 굳이 이런 때에 미나티아 게이트에 대한 고발이 발생했다는 걸 알고서, 쫓기는 신세면서 라디오까지 틀어 나와 형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들려줘 놓고서는 자기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근거도 없이 시치미를 떼는 거겠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 생각을 백태건에게 말하지 않았다.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백태건은 내 침묵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듯했다.

“혼란스럽겠지. 이해한단다. 설마하니 권 대표가 그런 짓까지 할 줄은…. 너를 아주 보내 버리려고 작정한 모양이더구나. 네게 정도 들지 않은 건지, 징그러운 녀석 같으니라고.”

그는 내가 제 말을 믿는다고 확신한 듯 원하는 대로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의 표정은 어릴 때 봤던 것과 마찬가지로 온화하고 인자했다. 그는 내 가족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살해하고 나서 열 살이었던 내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때도 저런 표정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고 모든 것이 명확하다.

나는 백태건의 말을 얼추 믿는 척 순순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장관님께서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하셨었죠.”

“음.”

“그럼…. 제가 미나티아 게이트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게 대체 DH에 어떤 이득이 되는 겁니까? 재난으로 인한 간접적인 피해는 있겠지만, 한국이나 DH에 큰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닐 텐데….”

“그래, 그럼 거기서 얻을 게 있어서 그러는 거겠지. 안 그렇니?”

“얻을 거….”

“DH의 연구팀이 그 안에서 무언갈 발견한 모양이더구나.”

“…….”

“아마 그 녀석이 원하는 어떤 물건을 만드는 데 필요한 거겠지. 이능력을 이능력자에게서 분리해 내는 기술 말이다.”

백태건은 의미심장하게 말을 줄였다. 그 이상 자세한 건 모르는 모양이었다. 전부 다 안다고 했으면서 사실상 그가 알고 있는 건 표면적인 것들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스스로가 신기했고 우습기도 했다.

“그걸 위해서, 저를 미나티아 게이트에 밀어 넣기 위해 권 대표가 이 모든 일들을 꾸미고 실행했다는 말씀이신 거군요.”

“그렇지.”

“그래서 몇 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거짓으로 제게 친근하게 행동하고 호감을 샀던 거고요.”

“그래. 녀석은 충분히 그럴 녀석이지.”

“…….”

“권 대표가 더 이상 너를 잡으러 오지 않는다 해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전처럼 지낼 수는 없겠구나. 나도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없을 거고. 너 또한 미나티아 게이트를 책임지고 처리해야겠지. 혼자서. 그건 아주 위험한 일이야. 위험하고말고….”

“…그렇군요.”

“불안정 게이트가 8레벨에 가까울 정도로 에너지가 강해졌다는 건, 그 안에서 뭔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거다. 어쩌면 그 전에 브레이크가 발생할 수도 있지. 게다가 애초부터 백널 게이트라 불리던 곳이니. 아무리 너라고 해도 몸 성히 돌아오긴 힘들겠지. 아주 높은 확률로 게이트에서 죽게 될 거다. 네 몸뚱이는 뭔지 모를 괴수들에게 찢길 테고. 두렵지 않니?”

그는 내가 두려워하길 바라는 것처럼 물었다.

본능적으로 모든 생물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기 때문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렴. 내게 방법이 있으니까. 또한 권 대표에게도 복수할 만한 방법일 테고….”

그는 더욱 안쪽으로 걸어갔다. 백태건은 거대한 수정체를 감싸고 있는 유리 벽에 손을 댄 채로 그것을 황홀하게 바라봤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황홀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게… 내가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자 형에게 복수할 방법이라고? 나는 이게 뭔지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내 돈이 들어갔으니까. 그것도 아주 큰 돈이.

“병원에 필요한 시설 아니었습니까? 분명, 환자에게 필요한 치료를 하는 장치라고….”

뭐라고 했었지? 게이트 브레이크 같은 파장 노출로 인해 피해를 입은 환자들에게서 에너지를 제거하는 아티팩트라고 했었다. 대형 게이트 재난이 발생했던 곳에 오라클들을 만든 이유 또한 강한 ESP가 터졌던 흔적이 많이 묻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중요한 연결 고리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백태건은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듯 돌리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란다. 방사능으로 암을 표적 치료하는 것과 같아. 아주 정밀히 다룰 수 없다면 아주 위험해지지.”

문득 DH에서도 이 재료를 쓴다고 얼핏 들은 게 생각났다.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MP 저장셀에 들어가는 비싼 재료였다.

그러니까 이건… 거대한 ESP 에너지 흡수체인 것이다.

방출도 가능한.

“…이걸 만든 게, 치료 목적이 아니었던 겁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거라. 치료 목적 또한 맞아. 충분히 가능하지. 그럴 만한 시간과 금전이 부족했을 뿐. 네가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만한 자금을 모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나.”

‘네가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런 말은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말이 헛소리인 것을 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한 가지 기능밖에는 할 수 없다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기능이지. 이곳을 중심으로 이 일대의 모든 가이딩 에너지를 긁어 올 수 있거든. 네가 네 힘으로 발동한다면 100km까지도 범위가 확장될 거다.”

가이딩 에너지를 긁어 온다고? 가이드로부터? 방식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MP 저장셀은 가이드가 직접 주입해 줘야 하는 물건이다.

“그걸 광범위하게 강제로 사람한테서 뽑아 간다면 부작용이 있을 텐데요.”

“그렇지. 아마 대부분의 가이드는 당분간 불능이 될 거다. 영구적으로 능력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고.”

“무슨….”

“생각해 보렴. 네가 얼마나 억울한 입장인지. 이런 능력을 가졌는데도 제대로 된 가이딩을 못 받아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는지. 다른 놈들도 같은 경험을 해 봐야지. 그래야 네게 더 큰 경외를 갖지 않겠니?”

궤변이다. 백태건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힘들다고 해서 남들까지 끌어내리는 건 옳지 못하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만, 권 대표는 가이드란다. 바로 근처에 있으니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거다. 권 대표에게 되갚아 줄 수 있는 기회야. 어떠니, 그 녀석이 너를 갖고 논 만큼 후회하게 해 주는 게? 그리고 그 에너지는 네가 가지는 거야.”

…이걸로 형을 다치게 하라고?

나는 형이 내게 손을 내밀던 모습을 떠올렸다. 간절한 듯한 목소리도. 그건 정말이지 너무 진짜 같아서 날 괴롭게 만들었다. 팔을 벌리고 숫자를 세면 형이 뒤로 넘어갈 만큼 급하게 뛰어가 안겨야 했던 기억이, 몸에 익어 버린 습관이 나를 충동질했다. 본능을 거스르는 것 같은 불쾌감마저 든다.

하지만 내 눈앞에서는 지금 백태건이 손짓하며 나를 부르고 있다.

“이리 오렴. 여기에 손을 올리고 네 힘을 주입하면 된다. 그걸로 시동을 거는 거야.”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백태건의 허황되고 비인간적인 계획을 들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려고 온 거니까.

“장관님.”

“그래. 빨리 오래도. 시간이 없어.”

“아뇨, 안 할 겁니다.”

“…….”

그는 대번에 불쾌한 낯을 띠었다. 내가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나를 다그치던 그 눈빛이었다.

“이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저는 당신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진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그나마 내가 들고 있는 검은 형이 준 것이라는 사실에 위안이 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나는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그래서 이 꼴이 됐지. 모든 걸 알았으니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진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형에 대한 미움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형에게 복수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실은 형의 곁을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모르는 척하고 그냥 형이 어떻게 해 주길 바라며 곁에 남아 있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렇게 바보같이 굴다가 언젠가 형이 계획대로 나를 다 써먹고 나면 버려지겠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형이 나한테 잘못을 한 건 없다.

아무것도 안 해도 미나티아는 어차피 내 책임이 되어 버렸을 것이고, 결국에는 내가 해결해야 했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멀쩡한 상태로 게이트에 들어가게 된 것도 형을 만난 덕이지.

그러니까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나는 형에게 실질적으로 피해 입은 것이 없으니 복수할 것도 없다. 슬픈 점이라면 그저 마음이 가짜였다는 것, 그거 하나인데 그건 원래대로 돌려놓으면 그만이다. 내가 값을 치르게 해야 할 대상은 백태건뿐.

부모님과 그때 죽은 사람들의 복수를 하고, 형과는 남이 되는 거다. 내가 조금만 덜 멍청하고 상식이란 게 있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됐겠지.

형은 더 이상 억지로 웃어 가며 나한테 잘해 줄 필요가 없다. 어처구니없는 부탁으로가족이나 애인 노릇을 할 필요도 없고, 역겨워하던 가이딩을 억지로 해 줄 필요도 없었다.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너무 괴로워서 형한테 섹스하자고 매달린 건 미안하게 생각한다.

“고통 없이 끝내 드리겠습니다. 이게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예의입니다.”

그렇게 말하자 백태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네가 나를 죽이겠다는 말을 한 거냐?”

“…….”

“내가 죽으면? 너 혼자 뭘 하려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칼 쓰는 것밖에 모르는 녀석이. 이 모든 걸 너 혼자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아니면 권 대표한테 다시 돌아가서 울며 매달리기라도 하려고? 아주 꼴이 우습겠구나.”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태건의 말대로 나는 여기서 벗어나자마자 온갖 것들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아무리 내가 상식이 늘었다고 한들 그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백태건은 쓰레기였으나 그가 내게 주어질 법한 여러 사회적 압박들을 처리해 줬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거라곤 그저 어쭙잖게 뭐라 변명하느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낫다는 거 하나뿐이었다.

아, 그래. 내 특성. 내가 그렇게 애써 지켜 왔던 경외 특성 수치는 이미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직 체감되지 않지만, 여기서 벗어나 매스컴에 잡힌다면 그때는 느낄 수 있겠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경외의 상실이 얼마나 내게 치명적일지 모르겠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두렵게 느껴진다.

결국 나는 형이랑 있을 때보다 훨씬 떨어진 능력치로 그곳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고도 만약 내가 살아 나온다면… 그다음에는 혼자가 되겠지. 백태건도 없고 형도 없는 채로 완전히 혼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전처럼 혼자 게이트나 처리하고, 가이딩은 약으로 충당하고. 그렇게 살아가겠지. 원래 그렇게 살았었으니 지내다 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냥… 좀 외로울 것 같았다. 혼자 잠드는 게. 그건 익숙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나는 게이트 안에서 순직할 것이다. 죄책감 때문에 벌을 자초하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밖에 없을 뿐.

한참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백태건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구나.”

방금 전까지 폭소하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태도였다. 백태건이 또 무슨 이상한 말을 할까 싶어 긴장한 채로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

“언젠가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아무리 내가 너를 위해 노력한다 한들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내 방식이 틀렸던 건… 미안하구나.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고 그건 부모 노릇 또한 마찬가지지. 과거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실패한 부모 노릇은 용서해 주렴.”

10년 넘게 나는 그의 말을 전적으로 믿도록 배웠고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미안하다는 말 정도는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는 저런 말들로 오랫동안 나를 쥐고 흔들어 왔었다. 나는 정신 차리기 위해 검 손잡이를 한 번 더 꽉 쥐며 차갑게 대꾸했다.

“살려 달라는 말을 길게도 하시는군요. 보기 좋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다. 그렇게 꼴사나운 짓을 할 수야 없지.”

백태건은 씁쓸한 듯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면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뭔가를 꺼내려 한다…. 나는 그 사실을 파악하자마자 두 걸음에 거리를 좁혀 그의 목 가까이 칼끝을 가져다 댔다.

“뭐 하는 겁니까.”

“잠깐, 잠깐. 기다려 봐라. 별게 아니야. 지금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겠니?”

“…허튼짓하지 마세요. 마지막 예의도 차려 드리기 힘들 수 있습니다.”

“예민하게 굴기는. 이건 총이다. 아이템도 아닌 그저 평범한 권총이지.”

그의 말대로 그 손에 잡혀 나온 건, 작은 총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가만히 그걸 응시했다. 대구경도1) 아닌 저런 권총 따위는 나한테 아무 의미가 없었다. 백태건도 그걸 아주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걸 왜?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 스스로 끝낼 수 있게 해 주겠니? 마지막 부탁이란다.”

“무슨….”

그는 미소 지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보란 듯이 천천히 총을 장전하고 머리 옆으로 가져다 댔다.

“자식 같은 녀석에게 칼 맞아 죽는 걸로 끝나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날 다리에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존엄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본인은 존엄히 죽게 해 달라니.

“…5초 드리겠습니다.”

“야박한 어른이 됐구나. 그새 그놈한테 물이라도 든 건지 원.”

“4.”

나는 문을 등지고 있었다. 백태건이 무슨 짓을 하든 여기서 살아 나갈 순 없을 것이다. 이 건물에 있는 거라고는 저 거대한 흡수체와 그걸 감싸고 있는 유리 벽, 그리고 그 앞에 설치된 투박하고 둥근 판이 전부였다. 방금 전에 백태건이 나한테 에너지를 밀어 넣으라고 시켰던 장치였다.

“3… 2.”

백태건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

그는 내가 마지막 숫자를 입에 담기 전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서 눈을 옆으로 굴렸다. 마치 그곳에 뭔가 있는 것처럼… 탕! 아주 약간의 각도 차이로 총알은 놈의 이마를 깊이 스쳐 피를 내며 옆으로 날아갔다. 나는 순식간에 총알의 궤도를 따라가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속임수다.

백태건이 유리 벽을 향해 몸을 던진 건 그 찰나였고, 나는 놈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등에 검을 관통시켰다. 채 2초도 걸리지 않았다.

대체 뭘 하려고 이런 짓을…!

백태건이 길게 뻗은 손이 바로 그 발동용 둥근 판에 닿았다. 그러고는 이내 몸뚱이와 함께 미끄러져 추락했다.

나는 검을 뽑으며 놈의 옷을 잡고 얼굴이 보이는 방향으로 당겨 뒤집었다. 이마의 상처는 희끗한 두개골이 드러났고, 흘러내린 피가 온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방금 내가 낸 가슴팍의 관통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빠르게 옷을 물들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놈은 웃고 있었다.

“하하….”

짧은 웃음에 식식 바람 새는 소리가 더 컸다. 유리관 안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흡수체가 아래에서부터 옅은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당신, 대체 뭘….”

백태건이 손댔던 그 장치는 버튼 같은 게 아니다. 이능력자가 에너지를 밀어 넣어 줘야 하는 장치다.

그럼, 그렇다면, 백태건이 에스퍼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티는 한 번도….

“뭘 한 거야?”

내가 이를 갈며 멱살을 쥐고 흔들자 그는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냈다. 바람과 피 끓는 소리가 반 이상 섞인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가 혹시나 중요한 말이라도 할까 싶어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널 선택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게, 내 마지막 실패였지.”

“…….”

나는 죽어 가는 남자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꺽꺽대며 피를 몇 움큼 뱉어 내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그걸 신경 쓸 새도 없이 장치 앞으로 가 피 묻은 판을 살폈다. 그 어떤 조작 버튼도 보이지 않는다.

“제기랄.”

나는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쥐며 상황을 판단하려 애썼다. 이게 주입하는 에너지에 따라 그 범위가 달라진다는 식으로 설명했다.

백태건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숨기고 있었든지 간에 나보다는 못할 것이므로, 그가 말했던 것만큼의 피해는 일어나지 않을 터. 하지만 적어도 형은… 근처에 있던 형은 분명 영향을 받을지도 모른다. 가이드 능력이 없어진다면 형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그렇게 친절하게 능력만 없애 주진 않을 것이다.

저걸 그냥 부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저건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라 특수한 메커니즘을 가진 광물 덩어리라 깨져도 계속 동작할 수도 있다.

제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아이템 실험하는 데 직접 참여하며 줄곧 곁에서 보고 들은 게 있으니까 뭐라도…. 나는 MP 저장셀의 자세한 원리를 떠올리려 애썼다.

내가 참여했던 MP 저장셀 실험의 목표가 뭐였지? 내 기억으로 그건… 내구도 테스트였다. 왜냐면, 흡수체에 직접 ESP 에너지를 과도하게 집어넣으면 망가져 버리니까. 그래서 백태건도 흡수체에 직접 손대는 대신 특수한 장치를 연결해 뒀던 거다.

나는 머릿속에 방법이 떠오르자마자 그것에 양손을 댔다. 족히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광물 덩어리 흡수체에 내 힘을 직접 밀어 넣는 거다. 강하게, 배터리를 망가트렸던 감각으로.

정답이었는지 광물의 아래서부터 번지던 빛이 잦아들었다. 오히려 더 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어두워진 흡수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 방법이 맞았던….

“우욱—.”

…어.

머리보다 몸의 반응이 빨랐다. 나는 내가 입에서 피를 줄줄 토해 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뒤늦게 격통이 찾아왔다. 몸의 피가 다 빠지다 못해 혈관이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이다.

거대한 흡수체는 내가 주입한 것 이상으로 내 몸에서 멋대로 에너지를 다 빨아 갔다. 순식간이었다. 나는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떼고 물러났으나 이미 늦었다. 사막에서 물을 일주일은 마시지 못한 것 같은 극심한 갈증이 찾아왔다.

쩌적….

번지던 실금은 내 힘을 모조리 다 뽑아 가며 그걸로 균열을 만들었다. 불길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던 흡수체가 폭발하듯이 부서졌다.

나는 팔을 들어 얼굴 앞을 막았다. 귀가 먹먹하다. 비틀거리며 팔을 내린다. 파편에 긁힌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고작 파편 때문에 상처가 난 건가…? 말도 안 된다. 이건….

나는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몸을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할 만큼 능력이 약화되다니. 형을 만나기 전에, 가이딩을 못 받아 거의 죽을 것 같은 상태로 돌아다닐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점점 뜨거워졌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게 진짜 리밋을 완전히 넘은 상태였고, 이게 진짜… 폭주 직전의 상태인 것이다.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평생 폭주 때문에 부모님과 많은 사람을 죽인 줄로 알고 살아왔는데, 아니었다. 겪어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초콜릿 따위를 먹고 느꼈던 감각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굴러떨어지듯이 아래층을 향해 내려갔다. 더 깊은 지하로. 방금 전의 폭발로 건물이 완전히 무너지진 않았지만 바닥은 뚫려 버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더 깊은 곳을 향해 몸을 옮기고자 했다. 병원이라면서 이렇게 깊은 지하층을 왜 만들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폭주라는 건, 그러니까…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그런 게 아니다. 한마디로 에너지가 빠져나와 구체화 돼서 주변에 피해를 주는 거다. 에너지 부족으로 폭주가 온 에스퍼는 대부분 죽는다. 목숨을 건지더라도 완전히 망가져 사람 구실도 하기 어렵다고 배웠다. 몸을 구성하고 지키는 데 쓰이던 에너지까지 다 방출해 버리는 거니까.

나는 최하층까지 내려온 뒤 앞으로 고꾸라졌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최대한 벽을 향해 기듯이 다가갔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폭주해 버리면 대체 얼마나 큰 피해를 줄지 모르겠다는 게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최대한 피해를 줄이려 깊은 구석에 내려왔지만…. 이걸로 될까.

그리고 미나티아 게이트도, 내가 처리해야 하는데.

머리가 둔하다. 고통에 마구 쏟아지던 호르몬들로도 감당되지 않을 정도였다. 정신이 완전히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방금 그건 완전히 멍청한 선택이었다. 차라리 장치가 발동하도록 가만히 놔두는 게 더 나았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는 끝없이 자책하며 형이 제발 최대한 멀리 있길 빌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눈앞에 한 인영이 아른거렸다. 초점이 안 맞아 흐려진 눈을 꽉 감으면서 제발 내 눈에 보이는 게 죽음을 목전에 둬서 생긴 환각이길 바랐다.

하지만 다시 눈을 뜨자 형의 모습은 더 가까워졌고 선명해졌다. 먹먹한 귀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절망을 느꼈다.

제발….

형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손을 잡았다. 피 때문에 미끄러지려는 손을 추슬러 깊게 고쳐 잡았다.

고작 이 정도의 접촉으로 상태가 조금이지만 나아지는 걸 느꼈다. 마른 입에 이슬 몇 방울이 떨어진 듯이.

내가 얼마나 큰 절망과 공포를 느끼건 몸뚱이는 정직하게 반응했다. 이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안아 달라고 매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화난 목소리를 냈다.

“왜…. 뭐 하러 온 겁니까?”

고통 때문에 잘게 떨리는 목소리는 쇳소리까지 섞여 생각한 것만큼 강하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가세요. 피곤하니까. 별로 보고 싶지도 않고.”

고통을 감추기 위해 짧게 끊어서 띄엄띄엄 말했다. 한시라도 빨리 형을 여기서 쫓아내고 싶었다. 손을 놓고 날 버리고 가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차마 형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은 채 찡그리며 더 강한 목소리를 냈다.

“귀먹었어요? 전부 다 지겨우니까… 좀 꺼지라고요.”

하지만 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손을 내 뺨에 가만히 대고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를 덮는 그림자가 느껴진다. 입술이 내 눈 옆에 닿았다.

그렇게 형이 가이딩 해 주기 시작하자 눈앞까지 왔던 죽음이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평소엔 괴롭게까지 느껴지던 좋은 기분은 지금의 내게는 약간의 진통 효과를 안겨 주었다.

하지만 고작 이걸로는 역부족이었다. 내 몸은 깨진 그릇처럼 됐고, 가지고 있던 에너지와 형이 주는 것까지 줄줄 새어 나가고 있었다. 몸이 점점 더 뜨거워져 공기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나는 시야가 흐려진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형에게서 멀어지려고 몸을 비틀며 급하게 말을 쏟아 냈다. 가이딩을 받아 조금이나마 나아진 목소리로 형을 밀어 내는 말을 뱉으려 애썼다.

“백태건을 쫓아가더니 이렇게 자빠져 있는 거 웃겨 보일 것 같은데, 백태건은 제가 죽였고, 그러다가 폭발물이 터져서 좀 다친 것뿐이라고요. 금방 나을 거니까 쉬게 좀 내버려둬요. 알아서 제 갈 길 갈 테니까.”

긴 말을 쏟아 내고는 헐떡거렸다. 내내 조용히 있던 형은 내게서 손을 떼지 않은 채로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래. 형은 너한테 나쁜 짓만 하는 사람이야.”

“…….”

“형한테 마음대로 욕하라고 하고 싶은데…. 네가 힘드니까 조금만 참아. 나중에 마음껏 욕해도 되니까…. 응?”

형의 목소리는 침착하게 들렸다. 평소에도 내게 원하는 게 있을 때 쓰던 부드러운 말투로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이는 형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이상하게 보이는 건지는 몰라도, 초췌한 낯을 한 형의 얼굴은 잔뜩 경직된 채로 굳어 있었다. 말도 안 되지만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시선을 회피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계속, 계속 지금까지 속여 놓고, 이제 와서 이러면 내가…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고요.”

“안 좋아하겠지. 싫을 거야.”

“다 필요 없고 꼴 보기 싫으니까 가라는 게 이해가 안 돼요? 못 배웠어요?”

“알아, 알아.”

“알긴 뭘… 뭘 알아요? 형 소리도 징그러우니까 그만 좀…. 제발….”

제발…. 제발 꺼지라고, 멀리 가라고, 적어도 이 건물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는 가 줬으면 했다.

나는 화내다가 마지막에는 거의 빌듯이 중얼거리고 목 안에서 피가 엉겨 고통스럽게 기침했다. 열 때문인지 안 그래도 제정신이 아닌 머리가 더 맛이 가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건지 판단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놓지 않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형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가만히 보면서 가이딩을 멈추지 않고 있던 형은 내 이름을 불렀다.

“자현아.”

나는 지금 궁지에 몰려 있었고 어떻게든 형을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형이 내 이름을 불러 주는 목소리가 좋아서, 그게 힘들었다.

잠시 침묵하던 형은 낮고 음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형을 밀어 내고 싶으면 더 심하게 말해야지. 끓는 기름에 지져서 쇼크로 죽을 때까지 고문하고 싶다거나. 눈알을 파 버려서 나한테 먹이고 싶다거나. 직접 하기 싫으면 전문가한테 넘겨도 되고.”

…뭐?

나는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멍하니 형을 바라봤다.

“할 수 있잖아. 못 하는 거 아니잖아.”

“…무슨 그런….”

“나를 만난 게 네 불행이라고 생각해.”

내 손을 가만히 내려둔 형은 피가 잔뜩 묻은 손으로 재킷의 단추를 풀고 웃옷을 벗기 시작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형이 뭘 하려는 건지 뒤늦게 깨닫고 잠시 숨을 멈췄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씨근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하지 마세요.”

내 예상이 틀렸길 바란다. 형을 쫓아내려는 내 노력은 헛수고였으며 여기서 더 깊은 바닥이 있던 건가 싶을 정도로 최악이다.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 말라고요!”

나는 거의 비명처럼 소리쳤다.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칠고 급한 손길로 웃옷을 다 벗었다. 형이 내 등을 받치며 내 바지 버클을 풀려고 손대자 나는 발작하듯이 뒤로 기었다.

“씨발, 미쳤어요?”

형에게 다시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욕설까지 내뱉었다. 일어나려 했지만 실패했고, 주저앉은 내 등 뒤에는 벽이 있었다.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은 형은 기어코 내 바지를 벗겨 내며 속삭였다.

“싫어도 잠시만 참아. 정말 마지막으로… 잠깐만.”

“제발…. 하지 마요…. 죽는다고요!”

열이 너무 올라서인지 드러난 맨살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소리 지르며 옆으로 피하려고 헐떡거렸지만 기진맥진해져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중력이 20배는 된 듯 온몸이 무거웠다. 그런 나를 자기 몸으로 가둔 형은 들고 있던 재킷에서 뭔가를 꺼냈다. 뭔가가 우르르 쏟아지는 소리도 들린다.

형의 재킷에서 함께 쏟아져 나왔던 물건들은 여러 종류의 안정제였다. 나도 위험할 때나 쓰던, 비싸고 쉽게 구하기도 힘든 상등품이다. 하지만 형이 가이딩 해 주고 나서부터는 필요 없던 것들.

저걸 형이 갖고 다닐 만한 이유라고는 하나뿐이겠지. 나한테 주려던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형이 너무 좋아서,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거기에 신경이 팔린 사이 형이 내 목에 뭔가를 채웠다. 보지 않아도 이게 뭔지 안다. 형과 삽입 섹스를 할 때 썼던 펄스 리미터였다.

“제발, 형…. 이런 거 하지 말고 가요…. 지금이라도…. 제가 안정제 이거 다 쓸 테니까, 그사이에, 빨리 가면….”

아…. 횡설수설하던 나는 꼴사납게 울기 시작했다. 한 번 흘러넘친 눈물은 완전히 내 통제를 벗어났다. 형이 죽을까 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울었다.

나는 형이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도 안다. 여기서 이런 짓을 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나는 둘째치고 형은? 다른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될지 상상이 안 되나?

나는 형을 그렇게 추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최악의 방법으로 권경우라는 인간이 본인이 그렇게 싫어하던 가이드라는 사실을 들키게 되는 건, 정말이지….

“…….”

형은 그런 나를 말 없이 쳐다보다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성급하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무작정 입술을 문질렀다. 평소와 달랐다. 이미 익숙해져서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던 행동이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뒤늦게 형의 옷을 잡고 밀어 내려 하자 형은 순순히 입술을 떼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현아. 형 안 좋아한다며.”

지친 목소리였다.

그렇게 말하며 형은 축축한 내 얼굴을 문질러 닦았다. 피 묻은 손바닥 대신 손등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기껏 닦은 곳이 다시 젖는다. 내가 울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형은 꼭 슬픈 사람처럼 보였다.

낮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안 좋아한다면서 이러면 안 되지. 형이 착각하게 되잖아.”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머리는 금방이라도 퓨즈가 나갈 것처럼 깜박거렸다. 남아 있던 속옷마저 벗겨진 것도 몰랐다. 어쩐지 졸린 것 같기도 했고, 꿈꾸는 것처럼 멍했다.

내 정신을 붙들어 놓으려는 듯 형은 내가 대답이 없어도 계속 말을 걸었다.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서… 그런 말을 하면 형이 속아 주고 싶어도 속아 줄 수가 없어.”

벌어진 다리 사이를 파고든 형의 손이 침착하게 밑을 더듬었다. 이내 차갑고 딱딱한 작은 병 같은 걸 구멍에 밀어 넣자 액체 같은 게 흘러 들어왔다. 몸을 보호하던 에너지까지 다 질질 새어 나간 탓인지 외부 자극이 너무도 강하게 느껴졌다. 몸 안에 들어온 이물질에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죽 돋았다.

얼마 안 지나 형이 그걸 다시 밑에서 빼낸 뒤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예전에 종종 먹었던 섭취형 안정제 병이 옆에 뒹굴었다.

“…형 안아 줘. 응?”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손으로 내 상체를 받쳐 내가 형을 안기 쉽도록 만들었다. 나는 형이 꼴 보기도 싫다고 말한 주제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형의 등을 안았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형의 체온이 시원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잘 가눠지지 않는 머리가 형의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형의 어깨가 내 피로 점점 젖어 들었다.

가라고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형을 껴안은 게 너무 좋았고 안심이 됐다. 피비린내 사이로 느껴지는 익숙한 형의 냄새가 내게 위안을 줬다. 그렇게 할 기운만 있다면 지금도 당장 형에게 꺼지라고 말하고 싶으면서도 형을 안은 손을 놓지 못했다. 한심하게도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다.

나는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형….”

윤활제 대신 안정제를 머금은 내벽을 형이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뱃속이 빠듯해졌다. 밑에서 나는 찌걱거리는 소리가 낯설다. 모든 게 엉망인데도 몸이 반응했다. 그건 성욕보다는 생존 욕구에 가까운 거였다. 긴 갈증 끝에 마시게 된 차가운 물이 얼마나 달게 느껴질지 알고 있기에 더욱.

전과 달리 형은 금방 손가락을 빼냈다. 대신에 밀고 들어온 것은 손가락 몇 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굵기의 성기 선단이다. 형은 날 못 움직이게 붙든 채로 말 그대로 구멍에 좆을 쑤셔 박았다. 제대로 풀어지지 않은 아래가 찢어질 것처럼 홧홧하게 벌어지고 골반까지도 빠듯한 둔통이 느껴진다. 주먹이라도 넣으면 이런 느낌일까 싶다.

충격에 나는 고개가 꺾인 채 입만 벌렸다.

“…흐, 악….”

뒤늦게 튀어나온 소리는 급소를 얻어맞은 듯한 신음 같았다. 맞닿은 몸과 점막으로 여름의 폭우처럼 가이딩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걸로도 이 고통은 가려지지 않았다. 형의 팔에 걸쳐진 채 늘어져 있던 다리가 경직돼 절로 발끝까지 움츠러들며 덜덜 떨렸다.

그런데도 형은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고 하면 기다려 주던 때와 달랐다. 형은 절박한 듯이 서둘렀고 숨도 못 쉬고 꺽꺽대는 나를 안고 밑을 밀어붙일 뿐이었다. 대신 말로라도 달래 주려는 듯이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괜찮아. 착하지….”

“아, 아….”

형은 날 위해서 이러고 있는 거였다. 그래서 싫다고, 천천히 해 달라고 할 수 없었다. 나는 덜덜 떨고 신음하면서도 형을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굴곡진 귀두부터 튀어나온 핏줄까지, 체온이 더 낮아 차게 느껴지는 형의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점성 있는 안정제는 내벽이 안에 들어온 성기와 더 꽉 맞물리게 만들었다. 뱃속 장기가 통째로 위로 밀려 올라가는 듯했다.

내장이 망가질 것 같은 공포스러운 고통에 아주 조금 익숙해졌다 싶을 때쯤. 형이 저번에 알려 준, 뱃속의 기분 좋은 곳이 짜부라들 듯이 짓눌렸다.

“……!”

감전이라도 당한 듯했다. 과도한 쾌락이 신경을 곤두세웠고 더 벌어질 것도 없어 얼얼한 아래가 절로 조여들었다. 뱃속 깊은 곳이 당기고 두근거린다.

형은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한 듯이 허리를 조금 물렸다가 더 강하게 박아 넣었다. 점점 더 깊어지는 삽입에 배가 터질 것만 같았다. 얕게 할딱거리면서 더듬더듬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단단하고 납작했던 뱃가죽이 연신 부풀었다 꺼지고 있었다.

분명 무섭고 괴로운데도 말도 안 되게 기분이 좋다. 자극이 과해서 뭔가 잘못될 것처럼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 내 몸은 살기 위해 형이 주는 것들을 갈구하며 더 깊게 맞닿기를 원했다. 형의 것이 뱃속에서 조금이라도 빠져나갈 때마다 아쉬워서 저절로 배가 조였다. 의식하고 하는 짓거리가 아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머릿속을 진탕 냈다. 내가 지금 무슨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를 만큼.

“흣, 읏, 으응, 혀, 형… 형… 아, 흐읏….”

축축했다. 형의 배와 내 셔츠가 옅은 백탁액으로 엉망이다. 그새 얼마나 싸 버린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형이 나한테 왜 자꾸 물을 질질 흘리냐고 타박했던 대로다. 심지어는 눈에서도 자꾸 물이 나왔다. 형은 눈물을 입술로 문지르거나 핥았다.

“응, 형이랑 하는 거야.”

착한 말투였지만 흥분으로 잠겨서 탁한 목소리로 형이 속삭였다. 쿵쿵대며 뱃속이 얻어맞는 듯했고 시야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내 몸뚱이는 쾌감과 함께 찾아온 고통마저 그 비슷한 감각으로 치환하기로 했나 보다.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다. 내장이 벌어지고 비벼져 달아올라 묵직하게 치받는 감각까지 오싹하게 느껴졌다.

아프긴커녕 발등까지 저릿해 자꾸만 발과 손을 움츠렸고 성기에서 물이 샜다. 나는 통제되지 않는 신음을 질질 흘리며 흐린 눈으로 형을 바라봤다. 더운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형과 눈을 마주쳤다.

형이 ‘응?’ 하고 작게 물어보며 눈을 마주치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어쩌면 만약 형이 이렇게 노력했는데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이런 무의미하고 추잡한 짓을 하다가 죽게 될 형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욕이어서는 안 됐다.

나는 숨을 고르려 애쓰면서 머릿속에 있는 말을 주섬주섬 내뱉었다.

“형…. 형, 흐으… 저, 형 안 싫어해요….”

“…….”

“거짓말한 거예요. 형이 너무 좋아서….”

형이, 저 때문에 죽을까 봐….

내 목소리는 정말 형편없었다. 중간중간 신음 섞이고 쉬어서 알아들을 수나 있을지 의심될 정도다. 귀를 기울이듯 내게 집중하던 형은 이를 꽉 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형이 네게 그런 짓들을 했는데도… 그래도 여전히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잠깐이지만 화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살갗을 깨물며 깊이 박아 넣은 채로 허리 짓을 멈췄고, 이내 꽉 찬 뱃속에 뭔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허억….”

배가 너무 불러서 토할 것 같았다.

“쉬이…. 가만히.”

그러지 않아도 등 뒤는 벽이었고 나는 형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깊이 꿰뚫려 있는 꼴이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고통스레 허덕이자 형은 아래를 빼 주지도 않으면서 내 머리를 감싸 쓰다듬었다. 말라붙은 피가 머리칼에 엉켜 있었다.

괴롭지만 이것도 날 위한 행동이라는 걸 안다. 나도 형의 등을 안은 채 떨리는 손으로나마 쓰다듬었다. 형이 내 뱃속에 사정한 것도 힘들지만 찝찝하거나 기분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그마저도 좋았다. 형이 주는 거라면 다 좋았다.

그러면서도 절망했다. 형이 무슨 짓을 하건 내 몸은 조금 나아지기만 할 뿐 여전히 깨져 있었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죽을까 봐 무서워서 질질 짜면서도 형을 끝까지 밀어 내지 못한 나는 찌질이였다.

물론 이건 형의 선택이라는 걸 잘 안다. 쫓아내려는 내 말을 무시하고 멋대로 이곳에 남은 건 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이 자기가 끔찍하게 싫어하던 짓을 하다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 괴롭고 마음이 아팠다. 나는 비참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형, 저… 틀렸어요. 안 돼요. 이거…. 저 이걸로는 안 돼서…. 이미 너무….”

나는 부디 이게 형의 등급이 낮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들리지 않길 바랐다.

“알고 있어. 괜찮아.”

형은 손에 군용 모르핀 주사처럼 생긴 C형 안정제를 들고 있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형이 그걸 나한테 주사할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안정제를 주입해 보려는 건가? 뭐든 상관없었지만 별 효과는 없을 것이다. 벌집이 되도록 수십 개를 꽂으면 모를까.

하지만 형은 바늘을 내게 가져다 대지 않았다. 대신 뚜껑을 열어 드러난 바늘을 망설임 없이 자기 허벅지에 꽂았다.

나는 형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저걸 형이 왜? 나는 기겁하며 형을 말리려 팔을 잡았다.

“형…!”

나는 가이드가 안정제를, 그것도 최고 용량의 C타입 안정제를 맞았을 때 일어날 법한 부작용을 떠올리려 애썼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아도 분명 안 좋다고 배운 적이 있었다.

인위적인 푸른색 약물은 금방 형의 몸속으로 사라졌다.

“자현아, 네가 너무 대단하고 강해서….”

“대체 뭐, 하는….”

형은 날 진정시키려는 듯이 뺨을 쓰다듬으면서 그걸 뽑아낸 뒤 다른 한 개를 더 꽂았다.

“지겨울 만큼 해야 한다고 했잖아.”


***


백태건의 모습은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처참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은 피했나 보군요. 죽은 척에도 일가견이 있으실 줄이야. 명이 참 기십니다.”

권경우는 백태건의 꼴을 훑으며 감상을 던졌다. 꿰뚫렸던 가슴을 불로 지져 지혈한 것인지 옷에 그을음이 묻어 찢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마의 상처는 꿰매려다 실패한 듯 붉게 드러난 진피에 피고름이 엉긴 상태였다.

며칠 방치된 상처의 썩은 내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그리 크지 않은 남자를 위압적으로 보이게 해 주던 군복은 과거의 잔재처럼 흉하게 찢어져 있다.

권자현은 실패하지 않았다. 다만 저 인간이 좀비처럼 질긴 탓이다.

굳이 빠른 죽음을 안겨 주지 않더라도 곧 명을 다할 것 같은 몰골의 남자는 그럼에도 안광이 형형했다.

“전쟁터에서는 흔한 일이야. 그래서 죽은 것 같아도 뒤집어서 머리를 찔러 확실히 죽이라고 가르쳤었는데, 마지막까지도 영 배워 먹질 못했지.”

“사람 죽이는 법도 가르치셨습니까?”

“그럼. 가르칠 수 있는 건 다 가르쳤지. 나 때에는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보다 사람 죽일 일이 더 많았거든. 요즘은 정말 살기 좋아졌지. 국제법으로 에스퍼끼리의 싸움을 금지할 정도니, 원.”

“그래서 당신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덕분에 저한테까지 차례가 돌아오게 됐군요.”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하며 권경우는 백태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총을 장전했다. 뻔히 보이는 앞에서 자신을 죽일 준비를 하는 남자를 보면서도 백태건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궁지에 몰린 쥐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없는 오래된 부둣가까지 그가 오게 된 것은 권경우의 몰이사냥 때문이기에.

“하여간에 되먹지 못한 말 꼬락서니 하고는….”

“슬슬 지루하군요. 할 말은 그게 답니까?”

“아니지. 권자현이는 어디에 두고 자네가 직접 왔나?”

“…….”

“보아하니 도로 받아 준 것 같은데, 녀석이 네게 잘못했다고 하던? 그래서 냉큼 거뒀느냔 말이야. 주인을 물고 도망간 개새끼를….”

탕—!

권경우의 손에 들려 있던 총이 사용된 건 그때였다. 스산하고 적막하던 항구에서 소음기 없는 날것의 총성이 울렸다. 권경우는 무감한 표정이었다. 백태건은 이를 악물며 비명을 죽이고 팔을 감쌌다. 권경우가 부러 빗맞힌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권경우는 자신을 가지고 실험했던 아버지와 연루된 모든 자들을 죽이고 싶어 했고, 그건 백태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자신이 가이드라는 비밀까지 알고 있으니 그 사실을 안 이후부터 줄곧 적의를 감추지도 않았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못했던 건, 사회적 지위보다는 백태건을 섬기는 권자현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거리낄 것이 없겠지. 권경우는 그가 손쉬운 죽음을 맞게 하는 대신 천천히 처형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태건은 여전히 비틀리고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흐흐…. 한 번 주인을 문 개가 두 번째 주인은 물지 않을 거라고 믿는 건가? 지금은 자네 말을 듣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엔 이리되겠지. 자네나 나나 별다를 게 없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그 말을 듣자 권경우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눈썹을 찌푸렸다. 그 찰나를 이용해 백태건은 옆에 있던 나무판자를 쓰러트렸다. 일순 시야가 가려질 만큼 터진 먼지들 사이로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발을 내디딘 백태건에게 꽂힌 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총알이었다.

“크흑….”

총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다뤄 본 백태건조차 위치 파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먼 거리에서 스나이퍼가 대기하고 있었다. 총알은 발을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피가 터진다.

이를 악문 백태건이 허리를 숙이고 주춤한 사이, 다가온 권경우는 그를 걷어차 바다에 빠트렸다. 온몸의 상처에 바닷물이 닿자 격통에 가벼운 쇼크 증상을 겪은 백태건은 허우적거렸다.

권경우는 그가 자신의 발과 다리를 붙잡는 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목덜미를 잡아 끌어 올려 바닥에 던져 놓았다. 그 모든 과정 내내 권경우는 무가치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전처럼 죽이고 싶어 안달 난 눈빛조차도 아니었다.

백태건은 상처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에도 뿌득거리며 이를 갈았다. 바닥을 긁는 남자의 손을 발로 지그시 누르며 권경우가 말했다.

“잘 뛰시는군요. 다리를 다쳐 15년 가까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던 분이.”

권경우는 그에게 여지를 주고 있었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백태건은 미간을 찌푸리며 걸걸하게 끓는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그래 봐야 녀석에게 예전만큼의 효용 가치는 없을 텐데? 자네의 징그럽고 가식적인 친절이 전부 연기였던 것도 들켰겠다, 그렇담 기껏 그걸로 올려 뒀다던 능력치도 떨어졌을 것이고…. ‘경외’ 특성 또한 마찬가지로. 그 상태로 미나티아 게이트에 들어가면 마수들의 특식이나 되겠지. 안 그런가, 응?”

“…….”

그는 말하는 중간중간에 피 섞인 가래를 뱉었다.

“계륵이야, 계륵. 크흐흐…. 이제 와 남 주거나 풀어 주기는 아까울 테고, UNGRA의 잘못을 DH가 대신 수습하는 이미지라도 가져갈 셈인가?”

백태건이 무어라 빈정대든 권경우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저 신발 밑창에 묻은 백태건의 피를 바닥에 비벼 닦으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 보자는 듯한 태도였다. 악에 받친 백태건은 신경질적으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금쯤이면 대강 알았겠지? 그 녀석이 가이딩도 제대로 못 받는 반편이라는 걸. 안색이 핀 걸 보아하니 약값 꽤나 들였을 법한데, 아주 아깝겠어. 설마하니 자네가 나서진 않았을….”

“…….”

“설마, 직접 하기라도 했나?”

“가이딩을 묻는 거라면,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의외로 선선한 대답이었다. 백태건은 일어나는 것을 포기하고 몸을 굴려 주저앉아 히죽대며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허. 자네가 그 짓을 해 줬다고? 아하…. 그래서 그런 거였군. 그래서였어. 그리 예민하게 굴더니, 그 녀석에게는 가이드질을 해 줬단 말이지. 하긴, 굶주리고 살았으니 그게 얼마나 달게 느껴졌을까… 쯧쯧…. 어쩐지 징그럽게 안아 줬다 하더니…. 언제부터, 얼마나 한 건가?”

백태건은 그렇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하지만 권경우는 그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았다. 단순히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전 같았으면 가이딩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모욕감을 느껴 분노하고 치부를 들킨 것처럼 굴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권경우에게 있어 그건 더 이상 혐오스럽고 떼어 내 버리고 싶은 과거의 증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네 아버지께서 알면 무척 역겨워할 거야. 그 친구는 말로 내뱉지 않았을 뿐, 가이드 같은 건 문란한 거머리쯤으로 여기곤 했지. 할 수만 있다면 빨리 놈들의 필요성을 없애고 싶어 했어. 그래서 가이드에게서 능력을 뽑아내어 만들 수 있는 안정제를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고.”

“아버지의 의도와 달리 그게 가이드들을 금수저 계급으로 만들어 주었죠.”

“그건 큰 문제가 아니야. 그보다는 자기 아들이 가이드 따위가 되어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까웠겠나? 그래서 자네를 고쳐 주려 한 것이고. 아주 많이 애를 썼지. 아들 녀석은 아비의 그런 노고도 모른 채 자기를 힘들게 했다며 제 아비를 물에 수장시켰으니, 원. 그 친구가 자식 복은 영 없었지.”

“그래서 적적하지 않게 당신을 곁에 보내 드리려 여기까지 온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한 권경우는 백태건의 다리를 쐈다. 평소에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절룩이던 다리를. 하지만 살갗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에 좀 더 묵직한 금속성의 파열음이 났다.

“끅….”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백태건의 한쪽 정강이는 평범한 살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금속성 비늘이 덮고 있는 듯한 모양새. 마치 경화 능력을 가진 에스퍼의 신체처럼 보였으나 이런 능력이 있는 건 다리 한쪽뿐이었다.

“친구는 무슨. 제 발로 찾아온 모르모트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백태건의 다리는 인공적으로 에스퍼를 만들려는 실험의 결과였다. 그래서였다. 그의 아버지가 살아 있던 시절, 그가 병원에 자주 방문했던 것은.

하지만 그와 달리 백태건은 그 실험에 자원했다. 그 결과, 그렇게 원하던 에스퍼가 되었으나 온전치 못했다. 능력 확인조차 어려울 만큼 불완전하며 등급을 책정하기 애매한 정도의 출력량. 게다가 이능을 사용하지 않을 때의 다리는 본래의 정상적인 기능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열등감에 젖어 제 몸을 망가트린 남자는 더 큰 결함을 갖게 된 채로 자신의 치부를 숨겼다.

“당신은 실험으로 에스퍼가 된 것을 숨겼고, 능력을 드러내고 사용하는 대신 차라리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을 선택했지. 나처럼.”

생존에 필요한 아주 약간의 가이딩은 몰래 약을 먹는 것으로 충당했을 것이다.

“언,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았지?”

온몸에서 썩은 내가 풍겨도 비죽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나이 든 남자의 얼굴에 드디어 균열이 생겼다.

“별로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전에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죽이고 싶은 것 외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건 조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권경우는 백태건이 저지른 짓들을 포함해 그의 동기를 추적했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권자현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야만 했는지.

단순한 권력욕 따위는 절대 아니다. 또한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현에게 투사하며 집착하는 나르시시즘적 욕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이상한 데가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오라클 같은 건 만들지 않았겠지.

백태건은 자신의 선택으로 얻은 좌절과 무너진 자존감을 고치기 위해 권자현의 삶을 망가트렸다. 또한 그걸로 만족하지 못하고 무작위의 다수를 공격해 자신의 비참함을 치유하고자 했다.

“자세히 볼 필요도 없더군요. 역겨운 냄새가 나는 비겁한 패배자의 발버둥일 뿐이었으니까.”

“…비겁한 패배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백태건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스나이퍼의 저격을 피하려는 요량으로 권경우에게 달려들었으나 이내 제압당했다.

굳이 총을 쏠 것도 없다. 무릎에 명치가 찍혀 나동그라진 백태건에게 다가간 권경우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낡은 그물로 그를 묶었다. 그리고 어촌 그물에 걸린 채 버려진 죽은 물고기 같은 꼴을 한 백태건을 끌고 방파제 앞으로 갔다.

그는 자현이 만든 백태건의 가슴팍 검상에 작은 기계처럼 생긴 무언가를 붙였다. 말이 붙였다지 상처에 쑤셔 박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라클에 있던 흡수체와 비슷한 물건입니다. 마침 우리도 그걸 가지고 개발하던 게 있어서. 안전장치를 다 빼 봤는데 이게 얼마나 잘 작동할지 궁금하군요.”

권경우가 하는 말을 이해한 백태건이 두 눈을 부릅떴다.

“너…!”

핏발 선 눈을 한 백태건이 저주를 퍼부었다. 그는 굳이 백태건의 입을 막지 않은 채, 꿈틀거리는 몸뚱이를 발로 밀었다. 더러운 것을 치우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끼와 따개비 따위가 붙은 방파제 사이로 백태건이 추락했다. 그물에 감싸인 채 틈 사이에 걸쳐진 남자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악에 받쳐 지르는 소리는 방파제에 먹힐 것이고, 파도가 칠 때마다 상처가 타들어 가는 고통과 함께 물을 먹을 것이다.

권경우는 잠시 그 광경을 내려다보다 몸을 돌렸다. 해가 지고 있었다.

열등감에 눈이 멀어 고통스러운 갖가지 실험을 감내하고 얻은 한 줌 정도의 능력은 보잘것없었다. F급 수준으로 분류되는 에스퍼들은 가이딩이 많이 필요하지 않아 리밋을 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저 기계가 무척 잘 작동한다면 백태건에게서 억지로 폭주를 끌어낼 수도 있겠지. 그게 차라리 백태건에게는 더 좋은 일일 것이다.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채로 어둠 속에서 고문받는 것보다는.

권경우가 떠나고 잠시 후, ‘팡!’ 풍선이 터지는 듯한 작은 폭발음이 방파제 사이에서 들렸다. 하지만 그 작은 에너지 폭발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하고 이내 시멘트 덩어리와 파도 소리에 묻혔다.

<15. 저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죽을 뻔했던 인간이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 건지…. 산책 간다더니 요즘 산책은 비행기를 타고 한대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돌아온 권경우를 힐난하는 건 예의 노지연 본부장이었다. 그녀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눈가를 비비면서 권경우를 흘끗 쳐다보다 다시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았다.

“못 치우고 온 쓰레기가 생각나서.”

“하이고, 환경 운동가 납셨다. 그쵸?”

노지연은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댔다.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이틀 전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로 돌아온 권경우가 엄청난 일거리들을 던졌기 때문이다. 돈으로 환산하면 수백 억원은 될 법한 흡수체 몇 덩어리를 연구소에 넘긴 탓에 노지연의 책상에는 빈 커피 컵이 쌓여 갔다.

“권자현은?”

“쌤들한테서 별 얘기는 못 들었는데. 아직 자고 있겠죠? 코마.”

“…….”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그 상태에서 이틀 만에 박차고 일어나면 그게 사람인가?”

권경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동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외쳤다.

“아니, 또 어디 가요? 보고할 거 있다니까…!”

“아래 병실에. 조금 있다가 돌아올 거야.”

짧게 대답한 권경우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저 인간은 보기보다 상태가 좋지 못했다. 갈비뼈와 쇄골에 금이 간 것은 둘째 치고 C형 고용량 안정제를 자기한테 꽂다니, 제정신인가?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것이 몸속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인간이….

심지어 하나도 아닌 두 개나 썼다는 말에 그녀는 진지하게 자살 시도를 하려던 것이냐고 물었다.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표정으로만 드러내고 있던 의사는 고맙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권경우가 그걸 쓴 이유는 명백했다. 여타 다른 가이드들로부터 추출하여 인공적으로 합성된 안정제를 가이드가 사용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에너지 과각성 상태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적은 용량이면 그 효과가 미미해 큰 의미가 없지만 고용량일수록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유도된 과각성 상태는 치명적인 약물 도핑과도 같아 중추 신경계에 큰 타격을 준다. 빠른 시간 내에 강제적인 혈액 투석을 통해서라도 혈중 약물 농도를 낮추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고용량 안정제는 그 가격 때문에라도 일상에서 쉽게 접하기 어렵기 때문에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뿐, 가이드 한정 독극물이라는 점을 모르는 이능력자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권경우는 그걸 두 개씩이나 자신한테 꽂아 넣었다. 자살하려는 게 아니면 그런 짓을 한 이유는 하나뿐이겠지. 그만한 가이딩이 필요할 만큼 위급한 에스퍼가 있었다는 것이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그날 권경우가 데리고 돌아온 권자현 에스퍼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권경우의 옷에 묻어 있던 피의 대부분은 자현이 흘린 피였다. 하지만 몸 상태보다 심각한 건 자현의 에너지 수치였다. 권경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정황상 유추할 수 있었다. 그는 자현을 살리기 위해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게다가 자현이 리밋을 넘어설 만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면… 일반적인 가이딩과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에스퍼의 육신은 자신과 닿아 있는 가이드에게서 에너지를 갈취했겠지. 그것도 자현이 훨씬 높은 등급이니 권경우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도 이상으로 빼앗겼을 것이고, 그건 가이드에게 상당한 고통을 준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안정제 부작용에 대한 처치만 받은 채로 태연하게 굴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그녀는 약간의 징그러움마저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권경우가 추가적인 의료 조치를 받고 강한 진통제까지 투여받은 건, 자현의 상태가 안정된 후였다.


***


권경우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자현의 능력 실험이 진행되곤 했던 지하 테스트센터로 연결된 엘리베이터였다. 그곳은 자현을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방공호에서 기절한 그를 데려다 가둬 뒀던 격리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도 몇 개가 넘는 문을 지나 그때의 격리실에 도착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삭막하고 위압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그곳은 한 명의 환자를 위한 넓은 병실처럼 보였다. 침대 옆에는 온갖 종류의 첨단 특수 의료 기기들이 설치되어 공간을 메꾸고 있었다.

침대에는 몸 여기저기에 상처용 패치를 붙인 자현이 잠든 것처럼 곤히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그는 자현의 옆에 앉았다. 그는 내내 자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이렇게 길게 자리를 비운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자신이 나가기 전과 변함없는 상태의 자현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손을 잡았다.

집으로 데려가 돌보거나 적어도 햇볕이 잘 드는 안락한 병실에 눕혀 놓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잠재된 위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현이 완전히 의식을 놓기 직전에 더듬거리며 했던 부탁 때문이었다. 폭주가 가라앉더라도 위험하니까 자신을 격리실에 가둬 달라는 부탁.

그는 고개를 숙여 자현의 손에 이마를 댔다. 델 것처럼 뜨겁던 체온도 정상으로 내려갔다. 기관지가 상해서인지 색색대는 숨소리가 들렸으나 이 또한 많이 괜찮아진 것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불가항력으로 이곳에 자현을 가둬 뒀던 기억이 떠오른다. 폭발하는 게이트로부터 DH의 연구원들을 지키고 에너지가 바닥난 채로 방공호로 숨어 들어가 피해를 줄이려 했던 이 애한테 자신은 무엇을 했던가?

죽다 살아나 창백하게 질린 자현을 구속용 의자에 묶어 놨다가, 정신이 들자마자 윽박지르고 발치에 천이대교 사건에 대한 파일을 던져 놨었다. 뒷머리를 잡아 고개를 젖히고 네가 네 부모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았느냐 몰아세웠다. 그리고 원하는 답을 얻자마자 밖으로 쫓아냈다. 만 하루 넘게 물조차 마시지 못했던 아픈 애를.

이 애는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백태건이 만든 감옥 같았던 그곳에서 홀로 잠에 들었겠지.

자신의 불행에 취해 사정도 잘 모르는 어린애를 괴롭히며 분풀이하는 인간이란 얼마나 추한지.

그런 자신을 구제해 준 것은 자현이었다. 그는 과거에 매여 자기 자신을 숨기고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자신을 바꿔 놓았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부끄러운 치부가 아니게 만들어 주었고, 오히려 다행이라 여길 수 있게 했다.

그는 백태건과 비슷한 인간이었으며 같은 짓거리들을 했다. 하지만 백태건은 추하게 몰락했으며, 감히 말하자면 자신은 이전보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이 애는 기만을 애정으로 돌려주어 자신을 다른 길로 이끌었다. 신조차도 이렇게 구원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돼먹지 못한 인간이라서….

이런 애한테 자신은 무어라 말했었나.


***


“실수로 가이딩 좀 흘렸다고… 응? 이렇게 흐물흐물하게 풀린 얼굴을 해서는…. 그렇게 좋아?”

그건 자현이 백태건에게 가기 직전, 하늘이 조금 어두워졌을 때 꺼낸 말이었다. 그는 자현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그런 나쁜 아저씨는 잊으라고 종용했다. 그런 인간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현의 모습에 치졸한 질투가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는 자현의 손을 잡고 가이딩을 흘리며 짐짓 실수한 것처럼 굴었다. 힘들어하는 아이를 온전히 위로하긴커녕 자신에게 관심을 돌리기 위해 유치한 수를 썼다.

“그런 게 아니라….”

자현의 난감한 눈빛을 보고 그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끼며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아니야. 형이 이거 못 해 줬으면 자현이가 형을 지금처럼 좋아했을 것 같아?”

“형….”

그는 종종 이런 식으로 ‘가이딩 때문에 형을 좋아하는 거냐’는 유의 말을 일삼곤 했다. 착한 애인을 괴롭혀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듣기 위해서.

“다행이네. 형한테 이런 능력이 있어서. 지금만큼은 아버지께 감사해야겠는걸.”

“…….”

자현은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그런 자현의 모습을 새삼스러운 듯이 응시했다. 웃느라 살짝 당겨진 입매라거나, 검은 눈동자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구름으로 흐려진 공기 속에서 흰 피부는 꼭 창백한 물감으로 덧씌운 듯 비현실적이었다. 부드러운 돌을 깎아 만든 것처럼 반듯한 콧날이나 턱선도 그림처럼 이질적이다.

권경우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자신의 어린 애인의 잘생김이 유난스럽다는 점만은 무척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눈앞에서 직접 대면했을 때 외모 때문에 능력이 과대평가된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지고 시험하듯이 더욱 날카롭게 대했던 거니까.

그는 또다시 의미 없는 가정을 떠올렸다. 아마도, 이 애의 능력이 지금보다 많이 모자랐더라도 이 겉모습 덕에 아주 많은 관심과 부를 얻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백태건이나 제게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지는 않았겠지.

자현은 형이 제게 많은 것들을 해 줬다고 매번 고마워했지만 그건 전부 다 원래 자현이 가져야 했던 것들이다. 돈, 명예, 신체적 안락함, 최고의 대우, 피나는 노력에 주어지는 정당한 대가.

그럼 자신은 뭘 줄 수 있나?

비록 지금은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상식적인 면을 제게 기대고 있다지만, 곧 필요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스스로 하지 못하는 부분은 실력 있는 매니저팀을 붙여 주기만 해도 대부분 해결된다.

지금까지 구태여 사소한 것들까지 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것은 이 애를 컨트롤하고 제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저보다 한참 나이 많고 성격도 좋지 않은 남자의 애인 겸 동생 노릇을 자처하며, 착하게 굴고 몸까지 대 주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그는 자현의 불행을 빌미로 곁에 있는 것이었다. 무지와 결핍을 이용해 사랑과 헌신을 받고 있는 거였다.

추위에 떨며 굶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 옷과 머물 곳, 그리고 따뜻한 음식을 준다면 깊은 감사와 호감을 느끼겠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의 이유는 될 수 없었다. 사랑을 강요할 이유는 더더욱 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말없이 앉아 있는 자현의 허리를 감싸고 등을 당겨 안았다. 얌전히 기대 오는 말랑한 애인의 귀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자현아. 형이 이걸로 유세 부리는 거 오래는 안 갈 거야.”

“가이딩 해 주는 거요?”

“응.”

“…왜요? 못 해 줄 거 같아요?”

“못 해 주는 게 아니라, 필요 없어질 테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기술은 더 좋아지고 안정제도 더 좋은 게 나올 거야. 너도 봤겠지만 다들 열심히 하고 있잖아.”

“…….”

“자현이한테 형의 가이딩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지금처럼 많이 할 필요도 없을 거고. 나중에는 아예 안 받아도 되겠지. 그럼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워질 테니까…. 기대해 봐도 좋을걸.”

“별로…. 글쎄요.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생각보다 오래는 안 걸릴 거야. 어느 정도 수준은 몇 년 내로 될 거 같으니까.”

“…….”

잠시 적막이 찾아왔다. 습한 바람이 더 세게 불더니 이내 안개 같은 빗방울이 흩뿌려지기 시작했다. 무거운 공기 속에 만개한 꽃과 잎들의 향기가 더 짙어진다. 권경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비 오네. 들어가서 씻고 일찍 잘까.”

하지만 자현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 멀거니 앉아 있을 뿐이다. 그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서 입을 열었다.

“형, 있잖아요. 갑자기 하는 말은 아니고요. 오래 생각해 봤는데….”

“응?”

“…저한테 앞으로 가이딩 안 해 주셔도 돼요.”

“…뭐?”

충격적인 발언에 권경우는 자현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가 흠칫 놀라 손에 힘을 풀며 추궁하듯이 응시했다. 시선을 피하듯이 떨어트린 자현이 멋쩍은 웃음과 함께 변명하듯이 말했다.

“그게, 예전에 저… 감정 체크했던 적 있잖아요. 형이 제 목뒤에 센서 붙이고 항목별로 색깔 보여 줬던 거요. 그때 제 감정이 완전히 빨간색으로 나왔잖아요.”

“…그랬지. 그게 왜?”

설마 이제 와서 그 일에 의문을 표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제는 상식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건가? 그래서 당장 애인이고 뭐고 그만두자고?

권경우는 자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긴장하며 응시했다.

“지금은 기계에서 어떻게 나올지 좀 궁금해요. 그때도 많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제가 형을 그때보다 10… 30배는 더 좋아하게 됐거든요.”

“…그래, 그렇게 좋아하는데 왜?”

“처음에는… 형한테 그런 능력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운이 엄청 좋았다고. 제가 이런 상태가 된 건 형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 정도였거든요. 지금까지 힘들었던 것도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면 다 괜찮게 느껴졌고요. 형한테 가이딩도 받고 평생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

“하지만 형한테 가이딩은 안 좋은 기억인데…. 저 때문에 하기 싫어도 해 주는 거잖아요. 고맙다고만 생각했어요. 형이 착해서 그런 거라고요. 저한테 많이 잘해 줬으니까, 저도 형한테 잘해야겠다고…. 형도 저랑 만나길 잘했다고 느끼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는 멍청이가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짓으로 시작된 감정은 스노우 볼이 되어 돌아왔다. 그는 자현이 깊은 애정을 드러낼 때마다 애틋함과 동시에 생소한 죄악감을 느꼈다. 자신의 기만이나 알량한 불행의 결과가 아니라면 이 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요즘은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형한테 그런 능력이 없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형이 힘든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저한테 지금처럼 가이딩을 해 주지도 못했겠죠.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제가 과거의 형을 구해 줄 수 있었다면… 형이 지금 같은 능력을 갖지 못하게 되더라도 구했을 거예요.”

시작부터 잘못된 방식으로 얻은 행운이 너무 커져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건 그를 겁에 질린 쥐처럼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형이 저 때문에 싫은 걸 억지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안 좋은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요. 형이 원하는 목표를 이루고 바라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요.”

“…….”

이런 애정을 받고 감히 제깟 감정을 사랑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저는….”

“…….”

“…저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권경우는 눈을 떴다.

형이 행복했으면 한다고, 그래서 가이딩 같은 것도 안 해 줘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던 아이는 창백한 낯으로 누워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악몽이라도 꾼 것처럼 깊은 한숨을 쉬며 자현의 손을 잡았다.

침대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다 잠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혹시나 자기가 잠들었던 사이에 자현이 깬 것은 아닐까 확인했지만 아니었다. 어제와 같은 모습 그대로였다.

시계를 봤다. 벌써 아침이다.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었다. 여기는 창문이 없기에 시간의 흐름을 직관적으로 알기 어려웠다. 밤새 바이털 사인에 무슨 변화는 없었는지 살핀 그는 자현의 손등에 잠시 입술을 대었다가 병실을 나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연구동 사무실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쳐다봤다. 노지연과 수석 비서 실장이다.

노지연은 회사에서 자고 씻고 온 건지 목에 수건을 두른 채로 손에는 커피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까딱하는 고갯짓으로 인사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드디어 오셨네. 아주 거기서 살기로 한 줄 알았지 뭐야.”

“회장님.”

“먼저 얘기해요. 내 껀 급한 거 아니니까.”

“아, 예.”

보고 자료를 건넨 비서 실장은 그가 자세히 읽기 전 짧은 브리핑을 시작했다.

“UNGRA 내부 폭로에 대한 건은 지시하신 대로 여론 프레임을 전환하는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국제법에 따른 책임 소지는 여전히 파악 중이고, 높은 확률로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불안 여론을 이용해 의도적으로 상황을 악화시키려는 작업 세력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공포와 불안은 돈이 되지. 계속 확인해 봐.”

“네, 추적하고 파악 중입니다. 또한 글로벌 통신사 라인을 통해 권자현 님의 부상 및 과로 관련 보도자료를 동시 송출할 예정입니다. 외신들이 아시아 국장의 과실 쪽으로 헤드라인을 잡도록 프레임을 세팅해 뒀습니다.”

“백태건은?”

“추적을 피해 밀항을 시도하다 공해상에서 실종된 것으로 준비해 뒀습니다. 이후 적당한 시점에 훼손된 시신이 인양되는 시나리오로, 잡음 없이 변사로 종결되도록 유관 기관과 조율해 두겠습니다.”

미나티아 게이트가 악화된 사실에 대한 은폐는 DH, 정확히는 권경우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다. 백태건도, 권자현도 몰랐던 일이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백태건이 그에게서 권자현을 떼어 내기 위해 권자현의 탓으로 먼저 뒤집어씌운 탓에 UNGRA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듯이 확정되어 버렸다. 언론이 좀 더 깊게 파고들더라도 DH는 비즈니스적으로 파장 안정기를 지원해 줬을 뿐 직접적인 책임은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최종 성명서 방향은 이렇게 하지. 미나티아 게이트 문제는 DH가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발표해. 그리고 그 성명과 동시에, 권자현 에스퍼를 우리 쪽으로 직접 영입하겠다는 내용을 함께 얹고.”

“자현 씨 아직 우리 꺼 아니었어? 몰랐네, 나는?”

노지연이 혼잣말했다. 권경우는 미간을 문지르며 이어 말했다.

“…타이밍을 맞춰서 그 전에 우리가 개발 중인 신기술 찌라시도 유출된 것처럼 꾸며. DH가 뭔가 큰 걸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대중이 제멋대로 추측하게 만들어. 돈 냄새를 맡은 놈들까지 꼬셔서 시선이 더 분산되게 만들고.”

“지시하신 대로 세팅하겠습니다. 다만…. 이렇게 되면 단순한 기업 성명 발표 수준이 아닙니다. 그 ‘권자현 에스퍼’를 영입하는 것부터가 기업을 인수하는 것만큼 파장이 클 거라 여겨집니다.”

“그것도 공공 기관을 사유화하는 것처럼 말이 나오겠지.”

“네. CEO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란 사실은 금방 알아차릴 겁니다. 결국 결정권자인 실소유자에게로 언론의 관심과 추적이 쏟아질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정도 규모라면 비서실의 디펜스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서 실장은 권경우의 언론 노출을 극단적으로 꺼려 하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무척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권경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더는 거기에 시간이나 비용을 낭비할 필요 없으니까. 내가 드러나는 걸로 시선이 더 분산된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예? 상관… 없으시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들은 비서 실장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갔다.

권경우는 피곤한 듯이 이마를 짚으며 비서가 넘겨준 권자현에 대한 기사에 시선을 뒀다. 자현이 뒷배를 잃었다 판단한 탓인지 전 세계에서 자극적인 찌라시를 양산해 내고 있었다. UNGRA와 미나티아 사태와는 전혀 관계없는 루머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권자현의 게이트 클리어 횟수가 요 몇 달 사이 큰 폭으로 줄었다는 건 아주 좋은 가십의 재료였다.

성실하던 공공의 영웅,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쓰레기 게이트까지 모두 다 해결하던 괴물이 조금 인간적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자현이 파업이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비록 횟수는 줄었을지언정 콜업이 뜰 만큼 위험한 곳들은 마다하지 않고 처리했단 사실은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개중에는 익명의 헌터 커뮤니티발 목격담 따위도 있었다. 권자현이 DH의 고위 임원을 경호하며 함께 다니더란 내용이 와전되어 ‘권자현이 자신의 몸값을 띄우기 위해 일부러 미나티아의 리스크를 방치했다’ ‘미나티아 일대를 망가트리기 위한 한국의 정경유착이 있었던 것이다’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소설까지 팽배했다.

권자현의 특성상, 이런 가십거리에 휘말릴수록 더욱 취약해진다. 아무리 손을 쓴다 해도 이 사태가 정리되려면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것이다. 게다가 권자현이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진실이 어찌 됐건 루머에 신빙성이 더해질 것이다.

그는 비서 실장이 건넨 자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덧붙였다.

“권자현 정도 되는 에스퍼가 전속 가이드와 같이 다닌 게 책잡힐 요소는 아니지 않나?”

“전속 가이드?”

“그래. 나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요? 설마 본인이 가이드인 걸 공개하겠다고요?”

노지연은 권경우에게 눈이나 팔이 몇 개쯤 더 생기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권경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필요하다면.”

“음…. 그래요. 그거 참 놀라운… 재밌는 말이네요. 일단 잠을 좀 자는 게 어때요? 며칠 잠을 못 자서 그런가 사람이 좀…. 나중에 다시 생각해 봅시다. 정신 들면 바로 취소할걸?”

그녀는 그가 사람 말 대신 술 취한 북극곰 울음소리라도 낸 듯이 굴고 있었다. ‘사람이 이상해졌어’라고 다 들릴 정도로 혼잣말을 했지만, 권경우는 굳이 그 말에 반박하거나 반응하지 않았다. 권경우는 자현의 옆에서 잠시 눈을 붙였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상태였으며, 더욱이 피곤함 따위를 느낄 여유는 사치였다.

“보고는?”

그는 아직 노지연 본부장이 언급한 ‘보고’를 듣지 못했다. 그녀는 자동문의 버튼을 누른 채로 나가라는 듯이 손짓하며 대답했다.

“자리를 옮겨요. 자현 씨의 상태에 대한 거라, 여기서 얘기할 만한 건 아니라서.”

“…보고할 만한 특이 사항이 확인됐다고?”

그 애한테?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자현이 누워 있는 지하층에는 안전을 위해 상주하는 인원이 없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은 뇌관이 살아 있는 시한폭탄과 마찬가지였으니 같은 층에 있는 것조차 목숨을 거는 일이다. 때문에 정해진 시간마다 상태를 보고 기기를 체크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 곁에 오래 머무르는 건 권경우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애를 돌보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에스퍼에 대한 전문 지식이 깊은 최고 수준의 의료진을 데려다 놓았다. 권경우를 기다리고 있던 담당의 박 교수가 그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자현 씨의 ESP 에너지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서 전체적인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의식이 있을 때 확인하는 것만큼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이전에 하루에 몇 번씩 검사하며 쌓아 둔 데이터가 워낙 많아서요. 오차 범위가 있을 뿐 신뢰도가 충분한 데이터를 가지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

박 교수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진중한 어조로 운을 먼저 띄웠다.

“…….”

“먼저 말씀드리자면 권자현 님의 잔존 멘탈 포인트는 매우 낮은 상태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져 이틀 전보다 3배 이상 올랐지만 컨디션이 좋으셨을 때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 미치죠.”

“…그렇겠죠.”

당연히 그럴 것이다. 무게만 해도 수 톤은 될 법한 흡수체에 의해 에너지가 역류되어 폭주 직전까지 갔던 몸이다.

그때 그 애는 분명 죽어 가고 있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신체 보호 능력까지도 잃어 온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많이 흘려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헐떡이며 간신히 목소리를 내면서도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 판단하지도 못할 만큼.

어떤 치료를 때려 부어도 단시간에 나을 리는 없었다. 제아무리 권자현이라도 몇 달간 재활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본인이 거부하더라도 권경우는 자현을 가둬 둘 용의까지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백태건의 개짓거리로 구설수에 올랐으니 특성으로 인한 효과는 바닥에 처박혀 있겠지.

그 때문에라도 권자현을 미나티아에 보낼 수는 없었다. 미나티아 게이트 문제는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니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정예들을 어떤 식으로든 모집해 투입시켜야겠지. 비록 모두에게 공포와 회피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곳이라지만 충분한 돈이 주어진다면 에스퍼들로 한 팀은 꾸릴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퍼포먼스 정도는….

“아시다시피 에스퍼의 능력은 여러 가지 요소에 좌우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멘탈 포인트… 즉, MP 수치지만 상세히 들어가면 보유 에너지량, 출력량, 안정도 등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눌 수 있고 전부 다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죠.”

아는 이야기로 서론이 너무 길었다. 권경우가 미미하게 눈썹을 찌푸리자 노지연이 중재에 나섰다.

“괜찮으니까 본론 먼저 말해 줘요.”

박 교수가 고민하는 듯이 괜스레 안경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보유 에너지량은 MP 수치와 비슷합니다, 네. 그런데 안정도랑 출력량이 이상하더군요.”

“이상하다고?”

권경우의 어조는 낮았고 음산하게까지 들렸다.

이상하다니. 어딘가 영영 잘못되기라도 했단 말인가?

최근 들어 그는 다시 자현의 능력을 빼앗고 싶다는, 적절하지 못한 충동을 느꼈었다. 자현이 다쳐 돌아왔을 때는 더욱 그랬다. 이능력 추출기를 완성해 그 아이에게 쓴다면….

능력이 약해지거나 없어져 버린 그 애를 잘 달래어 곁에서 안전한 애인 노릇이나 하게 만들면 어떨지,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형한테 시시때때로 아랫도리나 빨리는 일밖에 못 하겠지만, 전보다는 확실히 편하고 안락할 것이다. 괜히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에 시달리지 않도록 평생 형만 보고 살게 하면 되겠지. 그렇게 묶어 두고 싶다는 음습한 욕망을 부정할 길이 없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더는 불가능해졌다.

형의 행복을 바란다며 가이딩 같은 건 안 해 줘도 된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이능력 추출기를 떠올렸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자현이 가진 것들 중 그 무엇 하나도 잃지 않길 바라며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 안경을 몇 번이나 고쳐 쓴 교수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이상하다는 건….”


***


많은 꿈을 꿨다. 잘 기억나진 않는데 한 가지는 확실했다. 대부분 형이 나오는 꿈이었다. 그중에는 형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됐을 때의 꿈도 있었다. 햇볕에 눈이 간지러워서 정신이 들었는데 누가 내 허리를 안고 있길래 흠칫 굳었고, 그러자 형이 더 세게 껴안으면서 잘 잤냐고 물었다.

‘아, 나 형네 집에서 같이 살기로 했었지.’ 하고 새삼 깨달았던 아침이 있었다. 형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좀 더 잘까?’ 하고 물어보는 게 너무 좋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웃으면서 뽀뽀해 주는 것도 좋았다.

그게 꿈이었는지 과거의 기억이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바라던 걸 꿈으로 꿔 버린 거지.

나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움직이며 엉망진창인 기억을 정리하려 애썼다.

백태건을 죽이고, 흡수체를 잘못 건드려 폭주 직전이 되었었지.

너무 아팠고 그 이상으로 공포스러웠다. 지하로, 더 깊은 지하로 구르고 기어서 내려간 다음에… 기억이 드문드문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날 찾아온 형한테 마구 욕하고 화냈던 기억이 난다. 꺼지라고 소리쳤던 기억도 난다.

도망치라고? 웃겨 죽을 만큼 멍청한 소리였다. 거기서 형이 날 버리고 뛰어가 봤자 폭주 범위를 벗어날 만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형은 거기서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만히 죽거나, 아니면 빌어먹을 가이딩이든 섹스든 뭐든 해서 날 진정시키는 데에 걸어 보거나.

‘자현아. 형 안 좋아한다며.’

‘다 죽어 가는 얼굴을 하고서… 그런 말을 하면 형이 속아 주고 싶어도 속아 줄 수가 없어.’

그다음은 거의 기억이 없다.

다만 확실한 건 형이 날 구해 줬고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형이 날 살리려고 그 난장판에서 5번까지 해 줬다는 거다.

아직 뜨지 않은 눈꺼풀 밑으로 물이 자꾸 새어 나왔다. 참으려고 이까지 악물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완전히 고장 난 것 같았다. 십여 년간 참아 왔던 눈물 같은 게 깨진 구멍으로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크린 채 아주아주 조금 흐느꼈다.

“…형.”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형한테 말하기까지 했으면서 나는 또 형이 싫어하는 일들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나는 눈가를 거칠게 손등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이불 위에 있던 건지 검은색의 정장 재킷 하나가 발치로 떨어졌다. 그걸 주워들었다. 형의 냄새가 났다. 다행히도 형은 괜찮은 듯했고, 그게 내 기분을 조금 나아지게 만들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 팔에는 링거줄이 달려 있었다. 조명은 밝지 않았다. 침대 주위로 형의 침실처럼 부드러운 불빛만 은은하게 들어와 있다. 또한, 여러 대의 기계 장치들도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이런 건 어릴 때부터 많이 겪어서 익숙했다.

이곳은 병실이라기엔 너무 넓었고, 창문이 있어야 할 곳에는 2층 높이의 유리 벽이 있었다. 나는 이곳이 어딘지 잘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기서 가장 빠르게,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나갈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뭘 해야 할지 생각했다.

링거 바늘을 뽑은 뒤 몸에 붙은 전극들과 이어진 의료 장비의 전원을 먼저 뽑아 버렸다. 전극을 먼저 떼어 버리면 경고가 울릴 게 분명하니까. 하지만 알아차리는 데에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형의 옷을 겉에 걸쳐 입었다.

정신 차리고 제대로 움직여야 한다. 일반 승객용 엘리베이터는 누가 탔는지 하나씩 기록되는 방식이다. 그쪽으로 가면 금방 잡힐 게 분명했다.

그래서 내가 노린 건 그쪽이 아니었다. 아이템 실험을 할 때 봤던 장비 이송용 엘리베이터. 사람이 쓰라고 만든 물건은 아니라 층고가 낮았고 이 건물에 몇 개 없는 아날로그 방식의 장치였다.

연구동 서쪽의 장비 보관실로 이어진 복도를 지나 열려 있는 연구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사람 하나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건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권자현 씨?”

김보나 씨다.

그녀는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내 꼴을 보고 보통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했다. 환자복에 어울리지 않는 정장 재킷을 걸친 데다 여기저기 붕대와 드레싱을 붙이고 심지어 맨발이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파리하게 굳어 갔다.

형이랑 아직 사이가 좋지 않았던 때에 그녀를 구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나한테 무척 친절하고 항상 도움을 주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DH에서 지내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나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창문을 쳐다보았다가 김보나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의 컴퓨터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먼저 사과하며 가까이 다가가 손에 든 쇠막대를 앉아 있는 그녀의 등 뒤에 가져다 댔다. 의자에서 뜯어 냈을 뿐인 볼품없는 쇠막대다. 하지만 이게 마치 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녀는 벌벌 떨었다. 이게 내 손에 들린 이상 웬만한 무기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나는 쫓기는 사람처럼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지 말고….”

그러다가 김보나의 모니터 화면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넓은 모니터 한구석에는 나에 대한 기사가 떠 있었다.

[[단독] ‘게이트 은폐 파문’ UNGRA, 아시아지부 특임관에 대한 책임론 확산]

[조사 기관에 의해 위험도가 8레벨까지 변동된 것이 확인된 만큼, 사태를 방치한 아시아지부 총괄 실무 담당인 특임관 K 헌터에 대한 법적 책임 추궁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한 그간 대중적 인지도와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온 K씨가 이번 UNGRA 게이트 은폐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그녀는 내 시선을 확인하고 급히 그 사이트를 꺼 버렸다.

“자현 씨, 이건… 이건, 대표님이 해결해 주실 거예요.”

그렇군. 이렇게 됐구나. 악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된다.

나한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내가 좋아하고 지키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들이 며칠 만에 산산조각 나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거라곤 상태가 좋지 않은 이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목소리를 낮추고 협박하듯이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짧게 말하겠습니다. …미나티아 게이트.”

“…….”

“그곳에서 나온 회수물들을 확인하다 DH의 연구팀이 뭔가를 발견했다고 들었는데요. 이능력 분리 기술이라고 하던데….”

나는 백태건이 했던 말을 흘렸다. 파리해진 그녀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보여 주시죠. 보나 씨가 본부장님 자료에 접근 가능한 거 알고 있으니까요.”

내 꼬라지나 목소리 때문에 겁에 질린 건지는 몰라도, 잠시 굳어 있던 그녀는 결국 내 말에 따라 자료를 열어 주었다.

다행히도 자료의 브리핑용 요약본은 잠깐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내용이었다. ‘이능력 분리 기술’ 연구에 대한 진척 및 방향성을 적어 놓은 것이었으니까. 미나티아 게이트의 회수물에서 실마리를 얻었던 연구는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홀딩되었으나, 어째서인지 대표님의 지시에 의해 재개되었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걸 보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그녀가 뭔가를 누른 듯, 날카로운 비상 사이렌이 울리고 복도에 붉은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

흠칫 뒤로 물러나며 그녀를 쳐다봤는데 김보나는 겁에 질리긴커녕 결연한 표정으로 내 손목을 붙들었다. 시간을 끌려는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지 마세요. 가지 말고 얘기해 보면….”

형이랑 얘기를 해 보라고?

“…….”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백태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 녀석은 자기한테 있는 가이드 능력을 무척 싫어했거든. 이능력을 없애는 방법을 개발하려 들 정도로. 그런 녀석이 계획을 위해 너와 그 정도로 부대끼다니….’

형의 마음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기 싫은 일을 한다기엔 요즘의 형은 나한테 잘 대해 줬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가이딩을 해 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형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자신에게서 이능력을 없애 버리고 싶어 했던 거였다. 여전히, 가이딩 같은 거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나는 그녀를 억지로 떼어 내는 대신 옆에 있던 책상 모서리를 우그러트렸다. 깜짝 놀란 그녀의 힘이 약해진 사이 창문가로 뛰어갔다.

“권자현 씨…!”

김보나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창문을 열었다.

“…제가 협박해서 보여 준 거라고 말하세요.”

그렇게 말하고 뛰어내렸다. 아스팔트 바닥에 착지해 연구동 담까지 도달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벽을 짚고 뛰어넘어 탈출하려는 순간이었다.

“자현아.”

나는 들어 버리고 말았다. 형의 목소리를. 그 목소리는 소리쳐 부른다기보다는 절망스러운 외침에 가까웠다. 그저 내 느낌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먼발치에서 눈이 마주쳤다. 형은 조심스레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뭔가를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자현아. 제발…. 그런 거 아니야.”

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새 몇 발자국만 더 다가오면 손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형.”

“자현아. 형이 다 말해 줄 테니까, 응…?”

나는 뒤로 물러나며 애써서 조금이나마 미소 지었다. 형을 추궁하거나 화내려는 게 아니었다. 내 말이 비난처럼 들리지 않길 바랐다.

“그만해도 돼요. 그런 거 이제… 안 해도 괜찮아요.”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형은 더 이상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싫은 짓을 억지로 하며 내 비위를 맞춰 주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 뭐라고 대답할지 무서워서… 그래서 급하게 도망쳤다. 뒤에서 멀어지는 사이렌 사이로 형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모르겠다. 형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착각했던 것처럼, 이것마저도 내가 듣고 싶어서 망상하는 환청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나는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갔다.



미나티아 칼라비-USG 게이트, 통칭 백널 게이트의 앞에 서게 된 건 그로부터 5시간 15분이 지난 뒤였다. 여론이 어떻든지 간에 나는 아직 UNGRA의 특임관이었고, 모든 게이트에 대해 무조건적인 입장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무기는 물론이고 입을 옷조차 없어서 현장 담당자가 보관하던 UNGRA 소유의 장비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조용히 접촉해 장비를 입고 준비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게이트 주변에는 구경 온 헌터들과 기자들이 많았다. 위험성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구역임에도 그랬다.

플래시가 폭죽처럼 터진다. 관심이 이렇게까지 버거웠던 적이 없다. 기자도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온갖 언어로 소리쳤다.

“권자현 특임관님! 평소 현장 최일선에서 게이트 안전을 총괄하셨던 만큼, 몰랐다는 해명만으로는 직무 유기 책임을 피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공식 입장은 언제 표명하실 예정입니까!”

“본인의 무죄를 주장하시려면 상부의 조직적인 정보 차단이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셔야 할 텐데, 현재 확보하신 물증이 있습니까?”

UNGRA의 현장 담당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그들을 번갈아 봤다.

“자… 진정하시고. 가까이 오지 마세요! 뒤로 물러나세요! 위험합니다!”

“…….”

나는 침묵하며 시선만 내려 내 무기와 옷을 훑어봤다. 어딘가에서 압수해 온 물건으로 등급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나 형에게 받았던 장비들에 비하면 별로였다.

그런 내 태도에 빈정이 상한 건지 몇몇 사람이 더욱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져 댔다.

“사기업 이직 제안받으셨다는 루머가 돌던데, 혹시 이직 몸값 올리려고 고의로 사태 방치하신 거 아닙니까?!”

“제의받은 조건에 대해 조금이라도 말씀해 주세요!”

“이 게이트는 어떻게 하실 예정이시죠? 빠른 시일 내 진입할 정예 팀을 구성해야 하는데, 직접 진행 중이신 겁니까?”

이제 형이 내게 준 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물질적인 것도, 가이딩 받아 넘쳐 났던 멘탈 포인트도 없었다. 배웅해 주고 마중 나와 안아 주던 형도, 행복했던 기분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것이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은 이제 내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원점으로 돌아갔다.

말도 안 되게 행복한 꿈을 꾸고 일어난 느낌이다. 생생하게 기억날수록 대비되는 추락감에 몸서리치게 되는 꿈처럼.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사람들을 침묵시켰다.

“…상황을 공유하러 나온 게 아닙니다. 미나티아 게이트는 저 혼자 진입합니다.”

“구체적인 일정을 말씀해 주시죠! 인근 주민들은 대피하여 불안함과 피해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인데 대체 언제….”

“12일 14시 32분경. 지금입니다.”

잠시 정적이 지나갔다. 이건 예상 밖의 발언이었는지 조용하더니, 곧 폭발하듯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특임관님! 게이트 진입은 상부와 합의된 공식 프로토콜입니까, 아니면 독단적인 행동입니까?!”

“잠시만요! 8레벨급으로 재측정된 게이트에 혼자 진입이라니, 자살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면피용 보여 주기식 퍼포먼스 아닙니까! 말씀해 주시고 가시죠!”

그 소음들을 뒤로한 채 나는 일렁이는 게이트의 아가리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피부가 저릿해질 만큼 강렬하고 밀도 높은 게이트 파장이 요동쳤다. 꼭 파도치는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이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아무리 나라고 해도 굳이 이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기에 공략 대상으로 여기지 않던 곳이다. 나는 내 죄 때문에라도 살아서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이었다. 전에는 그랬었다.


***


“이상하다는 건….”

박 교수는 설명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침음성을 내다가 입을 열었다.

“우려하신 만큼 권자현 씨의 상태가 나쁘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권경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직 충분히 안정을 취해야 할 상태는 맞습니다. 하지만 ESP 검사 결과를 보면, 전반적으로 양호합니다.”

“…양호하다고?”

박 교수는 다시 한 번 차트를 확인하며 펜 뒤로 머리를 긁적였다.

“예. 에너지 보유량은 아직 적지만 열흘 전 데이터에 비해서도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에요. 에너지 보유량도 흡수체에 의한 충격 때문에 회복이 더딜 뿐, 리밋을 넘겼던 것치고는 손상도 거의 없고요. 꾸준히 가이딩을 받고 약물 치료를 병행한다면 금방 이전 수준으로 돌아올 겁니다.”

“…….”

“아마 적합도가 높은 고등급 가이드에게 빠른 응급조치를 받은 것 같더군요. 깊은 점막 접촉을 병행했을 수도 있고요. 자료에서만 봤던 건데 실제 사례는 처음 봅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골든 타임을 넘겨 위험했을 겁니다.”

박 교수는 어디까지나 전문가로서 담백하게 설명했으나 그게 무슨 행위를 뜻하는 건지 모르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었다. 박 교수의 말을 이해한 노지연은 의심과 경악이 뒤섞인 눈빛으로 권경우를 바라봤다.

“…….”

“아, 그렇다고는 해도 MP나 출력량, 안정도 등은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아요. 몇 가지 추측되는 원인이 있긴 하지만…. 그래서 전담 가이드분이 계시다면 그분께 직접 물어보고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아니면 제가 직접 찾아가도 되고요. 어디에 계십니까?”

“접니다.”

건조하지만 마음이 급한 듯 서둘러 내뱉은 권경우의 대답에 박 교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예?”

“저니까 저한테 얘기하시죠.”

“뭐, 그… 회장님이… 전담 가이드시라고요? 권자현 씨의…? 그럼 직접….”

보다 못한 노지연이 중재에 나섰다. 그녀는 박 교수의 팔을 잡고 등을 밀어 밖으로 내보내며 말했다.

“박 교수님! 고마워요. 고생하셨어요. 이제 나가 봐도 돼요. 나머지는 내가 설명할 테니깐. 응응.”

“예? 예? 아니, 잠깐만….”

박 교수를 내쫓은 그녀는 문을 두 개 다 닫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기행을 저지르는 권경우의 얼굴을 심각히 쳐다보았다.

무슨 약이라도 잘못 처방받았던 건가? 역시 C형 안정제를 두 개나 꽂은 후유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뭐? 깊은 점막 접촉…? 그녀는 권경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어린애랑 지저분한 짓을 하고 싶어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조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노지연이 가까이 일하며 겪은 권자현은 대외적인 이미지와 달리 조금 무뚝뚝할 뿐 꽤나 애티가 많이 나고 말도 잘 듣고 성실한, 말 그대로 ‘어린 남자애’였다. 박사나 포닥들만 모여 있는 연구동에 끼어 있으니 유달리 어리게 느껴지던 면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그녀는 권경우를 훑었다. 외부 인사를 만나는 것도 아니면서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건지 핏 좋은 슈트 차림에 머리까지 넘겼으나, 눈에 띄게 초췌한 안색이다. 그는 경영인으로서의 이미지에 부합하기 위해 제 나이보다 원숙해 보이게끔 꾸미고 행동하는 남자였다.

둘의 사이가 대외적으로 알려진다면 가이드고 에스퍼고를 떠나서 그림이 별로 좋지 않을 것이다.

‘…소문이 퍼지기 전에 묵혀 놨던 스톡옵션을 팔아야 하나?’

내내 침묵하던 권경우가 뜻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지?”

“뭐가요?”

그는 무너진 오라클의 어두운 밑바닥에서 봤던 자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울고 소리치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던 모습을.

“…행복하거나 편안하지도 않고, 여론이 최악이니 특성마저 온전하지 못할 테지. 뭐 하나 긍정적인 상황이 아닌데도…. 왜? 그동안의 측정이 잘못되기라도 했나? 아니면 그 애가 가진 특성이 ‘경외’가 아니었던 건가?”

기쁜 소식이었으나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니면 행복해 보였을 때조차도 사실은 슬퍼하고 있었기 때문인 건지, 그래서 지금처럼 최악의 상황이 됐는데도 별 차이가 없는 건지…. 만약 그때도 지금도 그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면….

그는 최악의 이유를 떠올리며 자괴감과 죄책감으로 가슴이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도 모른 채 마냥 행복한 애새끼처럼 군다며 놀렸던 과거의 언행이 떠올랐다.

그 나름대로 예뻐하는 행동이었다. 가족도 애인도, 삶의 빈자리를 모두 다 꿰차고 형밖에 모르게끔 만들어 놓고는 귀엽다는 말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견딜 수 없이 예쁘고 애틋하게 느껴질 때면 징그러운 진심을 내뱉는 대신 이갈이하는 짐승처럼 깨물며 희롱하곤 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나를 좋아하는 거라고, 세뇌하듯 그렇게 말했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비겁하고 졸렬한 겁쟁이 같은 짓거리였다. 사랑해 달라고 기어도 모자를 판국에 갑이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굴며 애정을 착취하려 드는 꼴은 또 얼마나 흉한가?

혼자 중얼거리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침묵하고 있는 권경우를 향해 노지연이 난감한 듯이 말했다.

“아니, 그건 아니야. 자현 씨가 가진 특성은 그쪽이 맞아요.”

“…뭐? 그런데 왜….”

“이거 설명하자면 복잡한데….”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권경우는 내수 중심 제약 회사였던 DH를 직접 글로벌 거대 기업으로 키워 낸 장본인이었다. 일반적인 교육 과정이나 엘리트 코스는 밟지 않았지만 머리가 좋고 성실한 워커홀릭이었으며, 경영자적 능력뿐만 아니라 전문 지식도 깊이 공부해 제품의 개발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지금은 DH가 너무 커져서 직접적인 참여는 줄었으나, 전문 용어로 진척을 설명할 때 쉽게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는 전문가였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전문 지식이 있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또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유력한 가설을 대조해 결론을 내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설명을 시작했다.

“에스퍼의 특성이라는 건, 그 특성에 해당하는 감정을 주변으로부터 받게 되면 능력이 강화되는 현상이죠. 응. 출력이 오르고 멘탈 포인트가 눈에 띄게 상승하기도 하고…. 에스퍼에게는 가이딩이 가장 중요하고 목숨과 연관되어 있는 최우선 요소지만 권자현 정도 되는 에스퍼에게는 특성도 무척 중요하잖아요? 이능력이 정신적인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기본적인 지식이었다.

“그래. 그래서?”

“그런데 그 특성은 누구한테 영향을 받을까요? 당장 주변에 있는 사람? 아니면 같은 지역에 있는 사람? 아니면 전 세계인? 권자현 씨를 아는 사람만 해도 전 세계에 10억 명은 될 텐데, 그 사람들에게 전부 다 동일한 비율로 영향을 받을까?”

“…….”

특성은 지닌 에스퍼 자체가 많지 않기 때문에 관련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졌지만 아직 명확한 원리가 규명되지 않았다.

“모두에게 경외 받으면 당연히 좋겠지. 자현 씨도 많이 노력했던 것 같으니까…. 그게 헛된 건 아니었을 거야. 하지만 최근 추적 연구로 밝혀진 사실은 그래요. 알지도 못하는 전 세계의 사람들을 다 합친 거보다, 당사자가 중요하게 여기고 깊은 감정 교류를 하는 사람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거.”

“…….”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굳어 있는 권경우를 향해 그녀가 차분히 정답을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 때문인 거예요.”

“…….”

권경우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으나 노지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권 회장님, 당신이 그 애의 특성을 충족시켜 준 거예요. 매일 그렇게 끼고 돌고 예뻐하고 가이딩이란 형태로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채워 주기까지 하는… 음, 자칭 전담 가이드이신 당신이… 권자현 씨의 특성을 충족시킬 만큼 감정이 커졌으니까.”

“…그럴 리가.”

“단순히 행복하고 가이딩을 잘 받아서 오르는 수치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가파른 변화였죠. 원래부터 하늘 꼭대기에 있던 사람인데 최근에는 천지개벽할 수준이었지. 기계가 고장 난 줄 알고 돈을 얼마나 들였는지 몰라. 백 년은 무슨, 이백 년이 지나도 그 정도 능력을 가진 에스퍼가 또 나오긴 힘들걸?”

그녀는 뭐라고 길게 말을 이었다. 자현이 얼마나 믿기 어려울 만큼의 능력 변화가 있었고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말들이었다.

…그럴 리가.

내가 그 애를 경외한다고?

그럴 리 없었다. 그런 고결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제 마음대로 그 애를 주무르고 기만했으며 거짓말로 가스라이팅을 해 착한 애인으로 만들었다. 어린 동생 다루듯 예뻐하고 귀여워하면서도 소유욕과 욕정을 느꼈다. 다친 것에 마음 아파하며 능력을 빼앗아 아무것도 못 하고 제 형한테 다리나 벌려 주는 게 일인 사람으로 전락시키고 싶어 했던 역겨운 망상은 또 무엇인가?

자현이 제게 고백한 애정에 비하면 자신이 가진 감정은 감히 그에 빗댈 수조차 없이 징그럽고 음습한 것이었다. 비열한 겁쟁이의 사랑이다.

항상 대단히 여기고 칭찬했으나 그건 그저 객관적인 평가일 뿐이었다. 그 애의 활약 앞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고 감탄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 다른 이유가 있겠지. 나는… 그 애를….”

권경우의 중얼거림에 그녀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감이 안 오는 열등생을 대하는 듯한 낯으로 그를 보았다.

“인간의 감정이 하나만 존재해요?”

“…….”

“내가 남의 감정을 알아채는 데 많이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의 감정은 너무 복잡하고 중첩되어 있다고 항상 생각했거든요. 꼬여 있고, 불안정하고, 관측자 영향까지 받지. 회장님이라고 뭐 다른가?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당신이 제일 복잡해.”

그녀의 말에 논리적 오류는 없었다. 인간은 상대를 증오하면서도 좋아하고, 안타까워하면서도 경멸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게 그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

“그리고 권자현 씨 원래 상관이 개자식이었다며. 회장님 당신이 그 애를 아주 조금만 경외하더라도 뭐, 그 개자식보다는 당신이랑 있는 게 몇 배는 나았겠지. 날짜를 대조해 봐도 맞아떨어져요.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큰 영향을 줄 만큼 의미가 있나? 내가 그 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렇게 못 믿겠으면 직접 체크해 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선반 구석에서 바늘 달린 전극처럼 생긴 장비를 가져와 노트북에 연결했다. 일전에 자현에게 썼던 감정 측정기다.

“…….”

“근데… 내가 보기엔 99.9% 맞아. 당신이 얼마나 이상하게 구는지 남의 눈으로 봐야 돼.”

개발 단계에서는 감정 측정기를 여러 번 직접 테스트 했으나, 자현을 만나고 난 이후에는 자신한테 사용한 적이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기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다.

그는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애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저 한때의 육체적 욕망일 뿐이라고 외면해 왔던 감정을 스스로 직시하게 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애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 버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이거 업그레이드 몇 번 해서 좀 복잡해졌는데… 그래도 보면 대충 느낌 올 거예요. 전에는 한 번에 한 가지 색만 나왔잖아? 가장 높은 수치의 감정 한 가지만 나왔었는데, 지금은 top10까지 나오게 바꿨거든요. 임계점을 넘으면 감정 수치가 숫자로 나오구. 계속 보고하려고 했는데 우리 회장님이 애기 끼고 노느라 오죽 바빠야지.”

“…….”

그녀는 권경우가 그 장비를 외계의 물건이라도 보듯이 경직된 표정으로 노려보는 걸 보고 내심 혀를 찼다.

“아무튼 여기 둘 테니까 한번 해 봐요. 그럼 나는 이만 바빠서. 할 일이 지금 너어무 많아.”

노지연은 피곤한 듯 손사래를 치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그 장비를 내려다보던 권경우는 익숙한 손길로 자신에게 그것을 장착하고 노트북의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결과가 나오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한참을 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였다.

위이이잉—!

고막을 때리는 듯한 경보음이 울렸다. 그는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며 노트북을 덮고 장비를 제거했다.

“…회장님!”

급히 달려 온 비서가 문도 두드리지 않으며 들어와 사색이 된 얼굴로 헐떡거렸다.

“권자현 님이….”

주머니 속의 휴대폰도 경고하듯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뛰었다. 연구실의 문을 열자 보이는 건 울먹이는 김보나와, 그런 그녀의 앞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미나티아 게이트를 이용한 ‘이능력 추출 연구’에 대한 기밀 문서다. 찰나였지만 그는 자현이 무엇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깨달았다.

“아니야…. 이건….”

그렇게 중얼거리며 누구에게 지시를 내릴 겨를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를 부르는 직원들의 음성을 뒤로한 채 그는 겁에 질린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필사적으로 달렸다.

비겁하고 치졸하게 외면해 왔던 감정을 직시한 충격이 그를 떨게 만들었다. 평생 목매어 왔던 증오와 자기 혐오마저 내려놓게 만드는 이 변화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하잘것없는 자신의 죽음 따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 생겼다는 것.

그 애가 제 기만에 실망해 저를 외면하게 된다면 그 빈자리는 무너져 폐허가 되겠지. 또한 그 이상으로 그 애가 다칠 것이 두려웠고, 그 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감당할 수 있는 공포를 넘어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믿는 지경에 다다랐다.

‘멘탈 포인트나 안정도는 괜찮지만 아직은 치료도 휴식도 가이딩도 많이 필요합니다. 혹시나 하고 말하는데 게이트 진입 같은 건 당분간 금지입니다. 조금 괜찮다고 멀쩡할 때처럼 몸을 썼다간 더 오래 누워 있게 될 테니까요.’

하지만 머저리 같았던 과거의 자신은 그런 진실조차 모르고 외면한 채 죄를 저질렀다. 너무 많은 죄를.

그 착한 애가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가 버리려 할 만큼….

“아니, 자현아. 제발…. 그런 거 아니야.”

담벼락 앞에 선 자현을 본 그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평소에 좋아하던 형의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는 강박이 그를 조종하고 있었다.

“…형.”

“자현아. 형이 다 말해 줄 테니까, 응…?”

그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벌렸다. 이렇게 하면 항상 뛰어와 안기도록 가르쳤었고,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 하찮은 세뇌를 믿는 것뿐이었다.

“그만해도 돼요. 그런 거 이제… 안 해도 괜찮아요.”

“…….”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되도 않는 기만질로 주변 상황을 이용해 옭아매고, 자신을 사랑한다 믿게 만들고, 번호를 불러 반사적으로 뛰어와 안기게 하고, 매일 세뇌하듯 네가 형을 좋아하는 거라고 주입시켰던 거겠지.

그 애가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절대로 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


사아아아….

차원 경계 특유의 노이즈 같은 소리가 지나가고,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히 쾌적한 온도였다. 섬광탄처럼 강렬하던 차원 통로의 빛도 사그라들었다.

게이트 안쪽이 어떻게 생겼는지 마주한 순간 나는 제자리에 굳고 말았다.

내 눈앞에는 형과 함께 갔던 놀이공원이 펼쳐져 있었다. 유치할 만큼 형형색색 꽃밭으로 이루어진 인위적인 정원 가운데에 놀이공원의 입구가 있었다.

돌이 깔린 길게 뻗은 길과 파스텔톤의 가짜 성벽, 덩굴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큰 아치까지. 하지만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움직이는 놀이기구조차 없다. 하늘은 구름이 잔뜩 끼어 어두웠고 광활한 놀이공원이 텅 비어 있는 모습은 기묘한 위화감과 옅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행복했던 순간에 대한 그리움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 유명한 살아 있는 악몽, 생존율이 낮은 데다 살아 돌아오더라도 미쳐서 헛소리를 하게 된다는 백널 게이트의 내부에 대한 명확한 정보는 없었다. 몇 명 안 되는 생존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증언을 모아 보아도 공통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다만 그로부터 몇 가지 추측은 가능했다. 이곳은 들어오는 사람에 따라 내부가 변화하는 게이트일 것이다. 보편적인 공포가 아닌 특정 대상의 공포를 읽어 모사하는 것.

피어-니터 게이트도 비슷한 성질을 지녔으나 그보다 훨씬 극적으로 변하거나 환각으로 구체화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서 파장 출력이 더욱 불안정하게 찍히는 것일 테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또 다른 특징이 한 가지 있었다. 살아 돌아온 자들 중에 강한 에스퍼는 없었다. 등급이 낮은 보조 계열들이나 가이드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자료에서 보았던 문장을 떠올렸다.

‘해당 게이트에는 에스퍼의 능력을 모방하거나 빼앗는 기믹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아니었다. DH와 형은 이 게이트의 그런 특징을 알아내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거겠지. 게이트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하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 형이 원하는 ‘이능력을 분리하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그랬던 걸까.

‘나를 여기에 보내고 싶어서….’

제정신 박힌 놈이라면 제 발로 들어가진 않을 테니, 내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서 내부의 뭔가를 얻어내려 했던 걸까. 이곳은 UNGRA의 소관이라 DH 마음대로 채취물이나 아이템을 얻어낼 수 없으니, UNGRA를 약하게 만들고 직접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해서 이능력 분리 기술을 완성하고 형의 가이드 능력을 떼어 내 버리려고….

제발 아니길 바랐던 모든 증거가 퍼즐처럼 맞춰진다. 나는 퍼즐을 맞춰 가면서도 내심 맞지 않고 어그러지길 바랐던 것 같다.

가만히 서 있다가는 또 찔찔 짜게 될 것 같아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없어 더 광활하게 느껴지는 장소를 뛰지 않고 천천히 걸었다.

안쪽 화단에는 노랗고 붉은 튤립과 장미 따위가 색색깔로 피어 있었고, 바깥쪽 담벼락에는 푸른 수국이 만개해 있다. 약간의 서늘함, 바람결에 실려 오는 뒤섞인 꽃과 수풀의 향기까지도 형이랑 놀러 갔을 때 느꼈던 것과 똑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그때는 내가 우울해서 제대로 못 즐겼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떠올려 보면 그것마저도 행복한 추억이었다. 생각하지도 못한 많은 것들을 해 봤으니까.

의심이나 절망보다 많이 떠오르는 건 행복했던 시간들이다.

고작해야 반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그 전의 12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그만큼 많은 것들을 했고, 많은 감정을 느꼈고, 형과 지냈던 하루하루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을 때 형이 어떻게 웃었는지. 밤바람이 차다며 감기 걸릴 것 같다고, 그런 이상한 말을 하면서 또 얼마나 오래 안아 줬는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행복했고, 산다는 건 정말 좋은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잠들 때 내일이 기대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신기했었다. 형이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줬으니까 나도 할 수 있는 한 형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형이 원하는 건 뭐든 이룰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좋았던 기억들이 단번에 끔찍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먹먹할 뿐이다.

이 상황에서도 확실한 건, 난 형이… 잘못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길 바랐다.

내게 보여 준 모습이 가짜라고는 해도 가끔은 진짜로 즐거워했던 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마찬가지로 텅 빈 매표소를 지나 안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파장이 강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들어오자마자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으로 형태를 바꾼 이곳은 실체를 띠고 있었다. 피어-니터 따위보다 압도적으로 빠르게, 더욱 정교하게 기억을 모방하고 구현한 것이다. 먼 곳은 어떨지 몰라도 내가 있는 곳 주변만큼은 구현된 실제였다.

하지만 이 게이트가 어떤 구조일지 전혀 예상할 수 없으니 신중해야 한다. 여러 데이터로 파훼법을 분석하고 들어가는 다른 게이트들과는 다르다. 코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고등급의 게이트에는 드물지만 대화가 통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 몬스터가 등장하곤 했는데, 그런 개체는 일반적인 몬스터와 달리 정해진 공략 방식도 없기에 ‘엔티티(Entity)’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이곳의 코어 또한 엔티티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곳은 아니었지….’

이전의 진입팀들이 전멸하거나 몇몇 생존자만 간신히 나오는 데에는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었다. 괜히 미로 같은 걸 만들어 헤매게 만들거나 잡몹으로 시간을 끄는 곳은 아니라는 거다.

어쩌면 복잡한 것 없이 중심에 가장 강력한 코어 하나만 존재하는 구조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더 깊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무언가 이상한 게 눈에 보였다.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놀이공원에 어울리지 않게 슈트를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내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앉아 있던 벤치 옆에.

“…형?”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불렀다. 내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꼴사나울 정도로 들떠 있었다.

“형…!”

형이 여기 올 리가 없다. 게다가 만약 들어온다고 해도 먼저 와 있을 리가 없다. 정말 만에 하나 형이 여기에 왔다고 하더라도 그건 미친 짓이다. 내가 할 일은 당장 형을 내쫓는 거지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았던 목소리로 불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자현아.”

형이 돌아보면서 나를 불렀다. 일상적으로 부르던 그 목소리. 그 순간 내가 느낀 온갖 감정을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게 형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생명 반응도 없고 자세히 보면 뒤가 조금 비쳐 보인다. 환각이다.

‘당연하겠지.’

형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되고 있을 리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환각으로 만들어진 형은 나를 못 본 듯이 지나쳐 걸어갔다. 약간 빠른 걸음이었다.

나는 좀 더 각오를 했어야 했다. 백널 게이트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경험도 실력도 있는 팀들이 순식간에 전멸된 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미끼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가짜 형을 따라 놀이공원의 더 안쪽 가운데로 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에는 응당 있어야 할 놀이기구나 장식물 대신 다른 게 있었다. 오라클. 그것도 내부 폭발 때문에 부서지고 바닥이 무너진 그곳이.

“형, 도와주세요…. 저 좀 살려 주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그건 내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어지간해서는 게이트 안에서 긴장을 한 일이 없는데, 지금은 손에 땀이 배고 소름이 돋는 듯하다.

형이 멈춰 선 곳, 거기엔 꼴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내’가 있었다. 그건 내 모습을 하고 내 목소리로 훌쩍거리면서 징그러운 소리를 하고 있었다.

“형…. 흑, 흐으…. 저 너무 아파요…. 하아, 하아…. 제발, 형…. 저, 가이딩 해 주세요….”

무슨 이딴…. 고작해야 시작일 뿐인데 벌써부터 이런 정도면… 대체 이 다음엔 뭐가 있는 거지?

나는 지금 이 상황보다는 내 머릿속을 훤히 꿰고 있는 듯한 정교한 묘사에 기가 질렸다. 대체 어떻게….

“형, 저… 흐, 흑…. 너무 아픈데…. 안아 주면 안 돼요…? 조금만이라도….”

나는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기억나진 않아도 내가 저런 말을 했을 리 없다. 나는 형에게 꺼지라고 소리쳤었고, 형이 내 옆에 있다가 죽을까 봐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 내가 아무리 정신이 나가도 형을 붙잡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가짜 형은 짜증을 참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아….”

정말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는 사람처럼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거머리처럼 매달린다. 형이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신경 쓰지도 않고 저 좋을 대로 엉겨 붙는다.

“…….”

이건 내 공포를 훔쳐보고 게이트가 만들어 낸 환상이다. 날 괴롭게 만들기 위한 공격이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처참한 기분을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갈비뼈 안쪽을 손으로 움켜쥔 채로 쥐어짜는 것 같았다.

이딴 걸 가만히 보고 있어 봤자 좋을 게 없다. 나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헐떡거리며 검을 뽑았다.

그러자 ‘가짜 나’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형, 저 너무 힘들어요…. 아파요….’ 하고 징징대는 소리를 멈추고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그게 마치 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기준으로 나를 흉내 냈는지 모르겠지만 저놈은 지금의 나와 달리 형이 준 장비들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표정도 평이하지만 좀 더 밝아 보인다. 뺨과 귀에도 드레싱을 덕지덕지 붙이고,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해 핼쑥해진 나와 달리 깨끗하고 건강해 보였다.

껍데기만 보자면 남의 것을 입고 헐떡대는 나보다는 저놈이 더 진짜 같아 보인다.

내가 행복했을 때의 모습.

형이 나를 좋아한다 생각하고 잘 보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아침부터 머리에 신경을 쓰고 나가던 시절의 나. 그걸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건 어처구니없을 만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우습고 하찮은 멍청한 짓거리였다.

초조하지만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자세를 잡았다. 급하게 가져온 압수품인 검은 손에 잘 맞지 않고 어색했다. 게다가 멘탈 포인트가 많이 떨어져서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훅—

탐색을 목적으로 한 긴 횡 베기. 놈은 멀뚱히 있는 듯하더니 순식간에 검을 꺼내 들어 내 공격을 정직하게 막았다.

동시에 검끼리의 충돌음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폭발음이 터졌다.

쾅—!

엄청난 에너지가 맞부딪힌 것이 느껴졌다. 접촉은 순간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저놈이 코어 엔티티였다. 다른 방법을 통해 확인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뭐지?’

나는 충격에 저릿저릿한 손을 내려다보며 의구심을 가졌다.

내 조건은 빈말로도 좋다 할 수 없었다.

애써 지켜 왔던 경외도 상실하고 행복하긴커녕 뭐라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한 기분에, 바닥까지 긁혀 나갔던 멘탈 포인트는 형에게 가이딩을 받았어도 아직 낮은 수준이다. 나는 형을 만나기 전보다도 훨씬 ESP 능력의 상태가 나빠져 있어야 했다. 적어도 그때는 경외를 잃지 않았고 기분도 지금보다는 덜 비참했으니까.

그런데도 생각보다 괜찮았다. 최상의 컨디션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형을 만나기 전보다는 확실히 좋았다. 왜지?

내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만약 형이 가이딩을 해 줬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나는 약간 자신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놈을 공격했다.

녀석은 꼭 나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합을 나눌수록 점점 움직임이 정교해졌다. 마치 나를 실시간으로 복사하는 것처럼.

‘…젠장. 그럼 오래 끌수록 무조건 불리해지잖아.’

스스로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놈은 내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었고 내가 어떻게 공격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이 움직였다.

그것도 상대가 인간과 달리 지치지도 않는 존재라면….

그리고 움직임으로 대강 계산해 보자면 저놈은 나보다 에너지 출력량이 높았다. 내가 최고의 상태였을 때만큼은 아니더라도 중간 정도는 된다.

이건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발버둥 쳐 봐야 한다. 그게 최선이다.

울트라 마인드에서 나왔던 내용인데, 북유럽 신화에서 싸우다 죽은 용감한 전사는 죽어서 발할라라는 천국에 간다고 했다. 어렸던 나는 그게 멋지다고 생각했다.

내게 허락된 죽음은 그런 식일 거라고 생각했다. 내 이력으로는 예수님의 천국이든 염라대왕의 천당이든 가기 어려울 테니까, 그나마 내게 가능성 있는 천국을 바랐던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도 때때로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을 안 하게 된 건 형을 만나고 나서였다. 형이랑 있다 보면 발할라든 어디든 가고 싶지 않아졌다. 형이랑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어서.

나는 몸에 남은 에너지를 좀 더 끌어와 검에 실었다. 이런 식의 생물형 코어 엔티티는 보통 몸통에 코어가 있다. 게다가 능력을 보아하니 어딘가 외부에 숨겨 두는 타입도 아니었다.

놈의 공격을 한 발 받아 흘리는 척 옆을 노려 힘을 응축한 검을 내질렀다.

쉭—!

‘됐다…!’

공기가 찢어지는 요란한 파공음과 함께 나는 공격의 성공을 예감했다. 공격이 제대로 박히자 순간적으로 그 부위가 깨지듯이 벗겨지며 녀석의 진짜 모습이 얼핏 보였다. 가능성이….

“컥….”

……!

순간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암전되었다. 방금의 비명은 놈의 것이 아닌 내 것이었다.

마치 내가 옆구리를 칼에 꿰인 것처럼 가늠할 수 없는 격통이 쇼크를 일으켰다. 그사이에 반격을 한 건가? 어떻게?

정신이 나갈 정도로 혼란을 느끼면서도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고작 몇 발자국이 한계였다. 무너지듯이 주저앉으며 고통스러운 옆구리를 손으로 감쌌다. 이런 충격이라면 장기가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손에 잡힌 건 피도 내장도 아닌 멀쩡한 옷이었다.

“뭐, 뭐….”

나는 내 옆구리와 멀쩡한 ‘가짜 나’를 번갈아 보며 불길한 가정을 떠올렸다.

설마….

“…설마 고통이 전이되는 건가?”

그딴 능력까지 있다고? 그건 정말…. 도저히….

그런 나를 비웃듯이 녀석이 내 얼굴로 비죽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급 게이트의 코어 엔티티가 으레 그렇듯 놈에게도 지성이 있는 모양이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방법을 찾아보려 머리를 굴렸다. 방금의 고통에 몸이 긴장해 식은땀이 난다.

내가 가져올 수 있는 아이템은 많지 않았다. 그것도 전부 다 UNGRA의 창고에서 털어 온 압수품들이었다. 그중에 신경 차단제가 하나 있었다. 통각을 마비시키는 약으로,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했을 때 적어도 쇼크로는 죽지 않고 복귀하기 위한 것이었다.

웬만하면 쓸 일이 없다. 생물에게 통각은 매우 중요하다. 그게 없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스스로 몸을 망가트리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뭐든 해봐야 했다. 나는 급히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약을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쾅!

몇 번인지 모를 공격을 감행했다. 처음 몇 번은 통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이 막아 내는 빈도가 더 늘어났다. 그에 비례해 나는 점점 더 절망을 느꼈다.

그리 많지 않았던 에너지가 바닥을 치고 한계가 다가온다. 남는 건 아쉬움뿐이다.

내 상태가 좋았더라면, 멘탈 포인트도 멀쩡하고 장비도 내 것으로 입고 왔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좀 더 가능성이 있었을 텐데.

놈은 나였지만 그래도 최상의 상태만큼은 아니었으니 아마 3주 전쯤 이곳에 왔더라면 이겼을지도 모르겠다.

내 움직임에서 지친 기색을 느꼈는지 적당히 막던 놈이 삽시간에 내 검을 쳐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뻑!

주춤한 사이 놈에게 복부를 걷어차여 날아가 길바닥을 뒹굴었다. 통각을 억제한다 하더라도 물리적으로 폐와 내장에 충격이 들어오면 숨을 쉴 수가 없다.

“컥…. 큭….”

겨우 일어나 검을 치켜들었지만 그게 전부다. 신경 차단제의 약효가 줄어드는 기미까지 보였다.

꼭 나 같은 움직임으로 검을 집어넣은 놈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빌어먹게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것마저도 내가 대외적으로 특성을 지키기 위해 보여 주던 모습이랑 똑같았다.

놈은 잠시 날 쳐다보더니 내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대신 나가서 살아 줄까?”

“…뭐?”

“이미 거의 포기한 것 같은데, 의미 없는 짓은 그만두는 게 어때. 네 능력과 기억을 완전히 흡수하게 해 준다면 내가 나가서 대신 너인 척 살아 줄 수 있어.”

“무슨 개소리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놈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만약 가능했더라면 생존자인 척 밖으로 나온 괴물 놈이 있었겠지. 그리고 게이트 관리 시스템은 기어 나온 몬스터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하지 않다.

그러니까 이건 다 나를 현혹시키고 정신적으로 무너트리기 위한 코어의 공격일 뿐이다.

“나는 가이딩 같은 거 안 받아도 되니까 너보다 더 낫지 않나? 그리고 형에게서 가이드 능력도 떼어 내 줄 수 있지. 여기서 얻은 아이템이라고 말하면 의심하지 않을걸.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어.”

“…….”

“형의 소원도 들어주고 깔끔한 관계가 되는 거지. 형도 그걸 원할 거야. 나는 너처럼 징그럽게 질척거리지도 않을 거고. 그럼 적당히 친하게 지낼 수 있을걸.”

이건 가짜다.

그저 내 생각을 읽어 낸 코어가 내가 가장 괴롭게 느낄 만한 말들을 하는 것뿐이다. 내 머릿속이 만들어 낸 악몽과 다를 게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놈의 제안이 조금이라도 그럴듯하게 들리면 미친 거겠지.

나는…. 나도….

헐떡거리던 나는 뒤로 물러나 몸을 돌리고 후퇴했다. 몇 분이라도 더 거기서 놈의 목소리를 듣다가는 미쳐 버릴 것 같았으니까. 놈은 장소에 제약이 있는 듯 쫓아오지 않았고, 나는 정신이 오염되는 기분에 몸서리치며 도망쳤다. 저런 말들을 듣느니 차라리 몸이 부서져 죽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파장이 옅어지는 곳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내가 들어왔던 게이트 입구 방향으로. 비척거리며 꽃밭을 가로질러 놀이공원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담벼락 대신 높게 키운 나무와 꽃들의 뒤로 돌아가서야 멈출 수 있었다.

게이트 안, 코어가 만들어 낸 가짜 놀이공원에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마저도 내가 형이랑 갔던 때의 기억과 똑같다. 내가 그때 형에게 뭐라고 했더라? 아주 우습고 찐따 같은 고백을 주절댔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날 괴롭게 만들었고 그 정교함에 나는 감탄하고 절망했다.

나는 젖은 벤치에 앉아 가지고 온 약들을 입에 다 털어 넣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에너지가 채워진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길 수는 없다. 이런 안정제 따위로는 도저히….

여기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는 있었다. 그래서 많이 고민했다. 아주 많이.

죽는 건 괜찮았다. 어차피 형이 없었더라면, 형을 안 만났더라면 나는 오래 살지 못했을 테니까.

예전에는 막연히 지금이 아무리 힘들어도 참고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올해든 내년이든 메시아 프로젝트만 끝나고 나면 그나마 편해질 거라고,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랬더라면 나는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2년이든, 5년이든. 버티다가 결국 죽었겠지. 그게 게이트 안에서의 개죽음이든 방공호 속에서 폭주해서 죽는 것이든 간에.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형 덕분에 살고 있는 거다. 형이 몇 번이나 구해 줬으니 사실상 내 목숨은 형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형 덕분에 지난 몇 달 동안 너무 많이 행복했었다. 비록 그 시간들이 가짜일지라도 내가 가진 것들 중에서 가장 빛나는 것을 땅에 버릴 수는 없었다. 모조품임을 깨달았어도 내게는 여전히 소중한 거였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라도 형에게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형이 바라는 걸 이루어 주고 싶었다. 이곳의 코어를 가져가 연구하고 원하던 이능력 분리 기술을 완성하게 된다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마지막 수단은… 자폭이었다.

지금도 아슬아슬한 상태이니 억지로 폭주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폭주 상태로 놈을 붙잡고 죽는다면 코어도 약화되겠지. 운이 좋다면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생존 본능이란 게 있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폭주를 유도하기는 무척 어렵다. 제 목을 졸라 죽기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기절하기 직전에 폭주의 감각을 겪었기에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해야만 한다.’

나는 지친 몸을 기대고 마지막 휴식을 취했다. 풀 내음이 섞인 젖은 나무 냄새는 형의 옷에서 나는 향기와도 비슷했다. 아마 향수인 듯한데 잘은 모르겠다. 그냥 그것도 형한테 잘 어울리고 근사하고 좋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눈을 감았다. 형과의 추억 속 장소에서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건 그리 나쁘지 않았다.


***


자현이 사라진 장소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서 있던 권경우가 정신을 차린 건 부하 직원들이 달려온 이후였다. 아니, 정신을 차렸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이곳저곳을 헤집는 모습은 꼭 금단증상에 눈이 돌아간 약물 중독자 같았다. 냉정하고 날카롭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는 지시조차 제대로 내리지 않고 급히 무언가를 챙겼다. 그의 곁에 대여섯의 비서진과 임원들이 다가와 의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의 괴행동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권경우는 자현의 장비와 MP 저장셀 같은 내부 아이템, 노지연이 맡고 있던 흡수체까지도 죄다 쓸어 모아 차량 조수석에 처넣고 직접 운전대를 잡으며 전용기를 대기시켰다.

몇 시간 뒤, 미나티아 게이트와 가장 근접한 소형 제트기 전용 공항에서 급히 뛰어내린 그가 가장 먼저 맞이한 소식은 ‘1시간 20분 전, 권자현 헌터가 미나티아 게이트에 단독으로 진입했습니다.’라는 보고였다.

보고하는 비서조차 사망 비보를 전하는 양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백널 게이트의 악명을 익히 알고 있는 관계자들은 자현의 생존 확률이 높지 않으리라 판단한 듯했다. 자현이 다치고 폭주 직전까지 갔었다는 사실을 모름에도. 레벨이 격상된 백널 게이트는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권경우는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냉랭한 낯으로 “아, 그렇군.” 하고 대답하며 빠르게 걷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가 정상이 아니란 사실은 곧 드러났다.

“…여기에 들어가시겠다고요? 혼자서?”

그들은 불타고 있는 화학 공장에 맨몸으로 뛰어들겠다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황당하고 아연실색한 얼굴들이었다.

웬만해서는 진지하게 화내는 일이 없는 노지연조차 밝혀진 그의 목적에 기겁하며 비아냥댔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차라리 청산가리라도 한 그릇 마시지 그래요. 그럼 내가 구해 줄 수 있는데. 죽으러 가는데 순장하려고 랩에 있던 것까지 다 들고 온 거예요?”

헌터 라이센스와 허가가 없으면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게 게이트 진입이었다. 국제법으로 처벌받을 수 있는 행위였다. 심지어 에스퍼도 아닌 민간인이? 그건 그저 참신한 자살 시도일 뿐이다. 멍청한 죽음 리스트에 오를 만한 불명예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그룹 총수의 기행에 사색이 된 비서 실장이 침착하게 대안을 제시했다.

“회장님. 지금 급하게 인근의 파장 안정기를 모두 헬기에 싣고 오도록 지시를 내렸으니 안정화 작업 먼저 진행하시죠. 그다음에 적당한 길드 인사를 선발해 진입시키는 건 어떨까요?”

정석적인 제안이었으나 제안하는 이도, 듣는 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너무 늦는 데다 고작 그런 걸로 이 게이트가 충분히 잠잠해질 리 없다는 것을.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돈을 주든 간에 격상된 백널 게이트에 들어갈 사람은 나사 빠진 머저리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

권경우가 대답하지 않자 곁에 있던 노지연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 이럴 때 옆에 있다가 기겁해 따라와 버리는 바람에 말 같지도 않은 실랑이를 하게 되다니.

“들어가요. 들어가 봐. 들어가서 하루 내로 안 나오면 회장님은 죽었다 치고 회사는 이사회 소집해서 나눠 먹으면 되겠네. 갈 거면 나한테 자사주 보유분 중 20% 넘긴다고 유서 쓰고 가든가 해요. 내가 십 년 넘게 얼마나….”

“그렇게 해.”

“…뭐라고요?”

“하루 내로 안 돌아오면 사망 처리 하고, 직계 가족 같은 건 없으니 에바 첸과 이사회 소집해서 권한 대행을 지정하라는 말입니다. 지분 비율에 관한 건 공증을 참조해서 진행하고.”

“무슨….”

선을 넘은 빈정거림에 돌아온 것은 유언에 가까운 대답이었다. 이게 무슨 재미없는 농담인지 기가 막혀 넋을 잃은 채 서 있는 그들을 뒤로 한 채 권경우는 차로 걸어갔다.

챙겨 온 물건들을 꺼내 직접 안아 든 그는 그 어떤 언질이나 제스쳐도 없이 바리케이드를 넘어 게이트 입구로 다가갔다. 마치 업무를 수행 중인 양 아무렇지 않게 구는 태도 때문에 그를 제지하는 것이 늦었다. 뒤늦게 터진 경악 어린 소리를 뒤로한 채 그는 게이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숨 막히는 압력이었다.

피부가 저릿저릿할 만큼 강렬하고 짙은 파장은 한낱 가이드에 불과한 그가 견딜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8레벨로 격상된 게이트의 내부 파장은 상상하던 것 이상이었다.

마치 초저주파에 노출된 것처럼 압도되어 식은땀이 흐른다. 무력감에 몸서리치도록 만드는 환경 안에서 그의 육체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떠올렸다. 그를 에스퍼로 만들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실험 중 하나는 강제로 강한 게이트 파장에 노출시키는 거였다.

그의 무의식과 육체는 그때의 고통과 공포를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노는 15년여간 그를 밀어붙인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의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전혀 다른 감정이다.

그는 노트북 모니터 화면에서 보았던 자신의 감정 팔레트를 떠올렸다. 무겁고 어두운 증오 대신 다채로운 강렬한 색감으로 채워진 감정들.

본능적인 공포와 무력감 앞에서도 고행하는 순례자처럼 움직이게 할 수 있는 그런 감정들이, 자신을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게 만들었다.

‘경외심이 정확히 어떤 감정이지?’

예전에 자현의 ESP 수치를 검사하다 문득 들었던 의문이었다. 감정은 단어 단위로 분류해 낼 수 없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 감정이 없는 건 아니다.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그 애는 고민하듯 하나씩 대답하기 시작했다.

‘놀라고 두려워하고 미지의 존재처럼 여기고…. 경이로워하고…. 그런 거라고 배웠는데요.’

‘그리고? 더 다양한 상황에서도 쓰이잖아.’

‘음…. 자연을 보고 엄청나다고 생각할 때나….’

‘신 같은 존재에게도 쓰이지.’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하하…. 좀 거창하긴 해요. 왜요?’

‘네 능력을 위해서. 특성의 조건이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알아보면 네 능력에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런 대상에게 왜 경외심을 느끼는지 파악한다면 네게 적용해 볼 수도 있고.’

‘으음…. 그러게요.’

‘그리고 눈앞에서 압도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신을 믿고 경외심을 가지지. 그건 왜지?’

‘…기적 때문이 아닐까요?’

‘기적?’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서 기도 하는 거 아니에요? 자기를 구해 달라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 비는 거잖아요.’

‘기적….’

‘자기를 살게 할 수도 있고 죽게 할 수도 있는, 절대적인 존재라고 믿으니까요.’

당시에는 그저 큰 의미 없는 사사로운 대화로 여겼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으며 깨달았다. 그 애는 잘 모르겠다고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제게 이미 정답을 알려 줬던 셈이다.

그는 마침내 찾아냈다.

눈을 감은 채 꽃이 핀 풀 담장에 기대어 있는 모습. 멀리서 보면 마치 숨을 거둔 듯하다.

“…자현아.”

그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다 무너지듯 자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가지고 온 물건들이 요란하게 쏟아진다. 그는 자현의 뺨을 감싸 잡았다.

지치고 다친 모양새였다. 상태가 괜찮았더라면 먼발치에서 벌써 형이 온 것을 알아챘을 텐데.

천천히 눈을 떠 시선을 마주한 자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그의 존재에 절망하듯이, 고통스러운 듯이 눈을 깜박이다가 덜덜 떨며 그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왜….”

자현은 제 눈앞에 초췌한 낯으로 꿇어앉은 형이 제발 게이트가 만들어 낸 미끼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아니었다.

제발…. 대체 왜….

머리칼도 옷도 흐트러져 있는 형이 저를 와락 끌어안았다. 기억하던 향기도, 안아 주는 팔의 느낌도 형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자현은 형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옷을 붙들었다. 그건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공기를 찾듯이 본능적으로 그 품을 갈구했다. 이성으로 제어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형이 안은 순간부터 가이딩을 퍼부어 준 탓에 머리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제발…. 왜 그래요….”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자현은 자신이 울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제 목소리가 도저히 못 들어 줄 정도로 울음에 젖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기껏 형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퍼즐을 다 맞췄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고민하고 고민을 거듭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 여전히 형을 사랑했고 형이 행복하길 바랐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여기까지 따라와서….

고작 자신을 속이기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걸고 이 위험한 곳에 올 리가 없으니, 형이 어쩌면 저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또다시 기대하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형이 다치거나 죽을까 봐 걱정돼서 죽겠으면서도 동시에 그런 기대를 하게 만드는 형이 원망스러웠다.

자현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아챈 권경우는 불에 덴 사람처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무릎까지 꿇고 창백하게 질린 안색으로 연신 뺨과 눈가를 쓸어 주며 눈물을 닦으려 애썼다.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입을 맞췄다. 급하게 입술을 붙이고 문지르는 행동은 전혀 여유롭지 못했고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닿는 피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이딩에 잠기고 만다.

눈물이 잦아들고 나서야 입을 뗀 권경우가 말했다.

“형한테 설명할 기회를 줄래?”

“…….”

“조금이면 되니까, 응? 형이 다 말할 테니까….”

그는 착한 형처럼 미소 지었지만 파리하게 질린 얼굴은 꼭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현의 손을 끌어다 손가락과 손바닥에 연신 입을 맞추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듯 괴롭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진심을 뱉어 내는 목소리는 다정하지 못하고 바닥을 긁는 것처럼 처참하게 들렸다.

“형이 처음에 널 이용하려고… 일부러 예뻐했어. 적당히 잘 구슬릴 작정이었지. 맛있는 걸 사 주고 조금만 칭찬해도 네가 형을 좋아하게 되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 그게… 그게, 사실이야.”

권경우는 그렇게 고백하면서도 연신 자현의 뺨을 감싸고 쓸어내렸다. 망가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깃털 같은 손길로 조심조심 매만지고, 말하는 사이사이에 얼굴 여기저기 입을 맞췄다. 이 마음을 견딜 수 없어 쏟아 내면서도 고해 성사 하듯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런데 형이 널…. 너를 너무 사랑하게 되어 버려서…. 네가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그래서 너무 많이 실수했던 거야. 전부 다 처음 겪어 보는 것들이라서.”

“…사랑한다고요?”

자현의 표정은 믿지 못할 말을 들은 것처럼 혼란스럽고 멍했다.

그런 자현의 얼굴을 바라보던 권경우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몸을 짓누르는 압력은 가시지 않았다. 그는 원초적인 압박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을 집었다.

전투하느라 뜯어진 손과 얼굴의 드레싱을 새로 하는 손길이 무척 익숙했다. 그리고 MP 저장셀을 자현의 손목에 채우고, 노지연에게서 가져온 장비를 저장셀에 연결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그가 하는 행동을 당황한 채로 지켜보던 자현은 심상찮은 물건을 제게 연결하는 것을 보고 거부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권경우는 멈추지도, 자현에게 설명하지도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말한다면 형을 사랑하는 착한 아이는 자신을 밀쳐서라도 이 짓을 그만두게 할 것이 분명했기에.

노지연에게서 가져온 물건 안에는 오라클에서 회수한 흡수체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복잡한 회로가 연결된 캡슐의 뚜껑을 열어 드러난 흡수체 윗면을 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큭….”

순식간에 몸 안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감각에 숨조차 쉬지 못하고 고통을 견뎠다.

이런 걸 겪었구나. 이따위 작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흡수체에 쇼크가 올 정도로 에너지를 빼앗기고, 그런 격통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 이 애는 저를 살리겠답시고 그 어둠 속으로 비참하게 기어 내려갔던 것이다.

“…형! 뭐… 지금, 뭐 하는 거냐고요!”

갑작스레 쏟아져 들어오는 가이딩은 폭포와 같았다. 절대로 사람이 자의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현의 정신이 아찔하게 희어졌다가 간신히 다시 돌아왔다.

“다… 거의 다 됐어.”

권경우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자현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고 안색이 파리해진다. 형이 뭘 하는 건지는 몰라도 그만두게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자현의 생각은 형의 한마디에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자현아,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었지.”

“…그게 갑자기 무슨….”

“형은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그는 고통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도 초조하게 자현의 손을 붙잡고 손 마디를 쓸듯이 만지며 재차 말했다.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회를 줘.”

그사이 한 차례 과정이 끝나고 흡수체는 빛을 잃었다. 권경우는 너무 세게 쥔 탓에 잘 펴지지 않는 손으로 그것을 MP 저장셀에서 분리해 낸 뒤 옆으로 던졌다.

“형, 이게 대체…. 이거 저한테 지금… 가이딩이 아니라 이건….”

자현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으로 손목에 찬 저장셀을 더듬거렸다. 그제야 형이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알아차린 모양이다. 권경우는 먼저 선수 쳐 약한 소리를 하며 멋대로 한 짓에 용서를 구했다.

“다 끝났고, 다시 무를 순 없어.”

“…….”

“이게 너한테 도움이 된다고 말해 줄래?”

자현은 그런 형의 얼굴을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멋대로 제 것을 깎아 내어 주는 짓을 해 놓고 초조한 듯이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얼굴을 보았다.

“…제가 이거 …갖다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죠?”

“그래. 형은 비겁하고 치사한 겁쟁이라서…. 네가 형을 용서해 줄 걸 알고 이러는 거야.”

그렇게 말한 권경우는 자현을 다시금 끌어안았다. 결국 자현은 결국 포기한 듯이 형을 마주 안으며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조심스럽고 작은 목소리로 애써 품고 있던 질문을 꺼냈다.

“…저 좋아하는 거 진짜예요?”

“그래. 좋아하고… 사랑해.”

“진짜면…. 왜….”

왜 그런 일들을 하고,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말해 주길 꺼려 했는지.

“무서워서 그랬던 거라면… 네가 믿어 줄 수 있을까.”

“…뭐가 무서워요?”

“내가 널 너무 사랑하게 되는 게. 그걸 인정하는 게 두려웠어. 형은 너랑 다르게 약해 빠진 겁쟁이라서….”

“…형, 왜 그렇게….”

자현은 포옹을 풀고 형의 어깨를 짚어 밀어 내며 황당하다는 듯한 묘한 표정을 지었다.

권경우는 자현의 특성에 대해 떠올렸다.

이 애가 받아야 하는 경외를.

자신이 가진 감정들을.

“넌 나를 두렵게 만들어. 너를 잃을지도, 네가 날 떠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한심한 공포가… 나를 비열한 겁쟁이로 만들고, 머저리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어.”

그건 고백이었다.

“…….”

“네가 형을 사랑할수록, 이런 내 마음 같은 건 하찮게 느껴져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형이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네가 더는 형을 좋아하지 않을까 봐 무서웠거든. 내가 그렇게까지 찌질한 겁쟁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네게 화내고 졸렬하게 굴었지.”

“…….”

“이 지경이 되어서야 네게 겨우 털어놓을 수 있을 만큼…. 한심하지?”

형의 눈을 보다 옆으로 눈을 돌린 자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형의 애타는 고백에 다시 마음을 줘 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마음을 도로 가져간 적도 없으니 다시 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는 한다.

하지만 꼭 물어봐야 할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그럼 왜… 이능력 추출은 다시 연구하라고 한 거예요? 그거 형이 가이드인 거 싫어서, 능력 떼어 버리려고 시작한 거라고 들었는데…. 가이딩 하는 거 아직도 싫은 줄 알고…. 저는….”

자현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담겨 있었다. 저를 좋아하는 걸 믿는다고 해도 트라우마로 인해 가이딩이 싫은 건 별개의 문제니까. 혹시라도 여전히 싫은 거라면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면 최대한 횟수를 줄여 참아 보고 싶었다.

그런 자현의 질문에 권경우는 난감한 듯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건….”

대답하기 곤란한 건가? 역시 가이딩이 싫어서….

“당장 대답해 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형이 안 괜찮으면….”

“아니, 아니야. 자현이가 형한테 실망할까 봐 망설인 거야.”

“제가요?”

“그래.”

“…뭔데요?”

“자현이가 많이 다쳤을 때, 형이 너무 가슴이 아팠거든. 너무 많이 아파서…. 못 견디겠어서.”

“네.”

“그래서, 네 이능을 뽑아서 일반인으로 만들어 끼고 살까 했지. 그러면 다칠 일도 없이 형만 바라보고 살 테니까. 다른 인간들을 만날 필요도 없을 거고.”

형의 진중한 고백을 귀 기울여 진지하게 듣던 자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농담이죠?”

“형이 이럴 때에 농담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여?”

“…….”

자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형을 쳐다봤다. 너무 황당해서 눈물이 완전히 쑥 들어가 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슬퍼하고 화내는 것보다 훨씬 낫다. 권경우는 그런 자현의 얼굴을 붙잡고 웃으며 입술을 쪼듯이 맞추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때도 말했잖아. 네가 일할 필요 없게 되면 형 애인 짓이나 하는 걸 직업으로 삼으라고.”

“그게… 그런 의미였다고요?”

“그래. 돈 많이 준다고 했잖아. 형한테 뽀뽀 한 번 하면 열 장씩 준다고.”

“…저 무슨 꿈 꾸는 것 같아요.”

“꿈?”

“좋은 건 아니고 되게 이상한 꿈이요.”

“나쁜 꿈이 아니라 다행이네. 그런데 왜 싫다고는 안 해. 형이 너한테 나쁜 짓 하고 싶어서 안달 났었다고 하는데.”

자현은 괜히 딴 데를 보는 척하다가 작게 대답했다.

“뭐… 싫긴 하지만…. 형이 정말 정말… 너무 힘들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그러면… 그러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요. 형이 힘든 게 더 싫으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자현을 가만히 보던 권경우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 역시 농담인 거죠?”

그는 대답하는 대신 빙긋 웃었다. 농담은 아니었다.

저를 형이라 부르는 귀엽고 다정한 애인을 가둬 두고, 가르친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붙어먹느라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싶은 망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게다가 제 역겨운 욕망을 기꺼이 받아 주겠노라 말하다니, 이 얼마나 위험한 발언인가. 힘들어 죽겠다며 약한 척을 한다면 이 애는 형을 위해 추락을 감내할 것이다.

형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형밖에 모르고 사는 손안의 애인이 되더라도 원망하지 않고 웃어 준다면… 그러고도 사랑한다고 말해 준다면… 완벽하지 않나? 추악한 욕구는 사랑과 경애가 있다 하여 사그라들지 않는다. 도리어 더욱 징그럽게 변할 뿐이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도 평생 그는 자현에게 그런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형이 너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네가 행복해야 형이 더 행복할 수 있어.”

“…저도요. 저도 그래요.”

“그리고 지금도 뽀뽀하면 열 장씩 줄 수 있는데 뭐 하러.”

…응?

자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형을 쳐다봤지만 권경우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자현에게 가져온 옷과 장비를 입게 하고 제 검을 들게 했다. 훨씬 보기가 좋았다. 그는 내내 웃는 표정이었다.

“…형이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제가 실패한다면, 형도 죽는 거 알아요?”

“알아.”

그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자현이 죽으면 그는 더는 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숨 쉬지 못하게 될 것이다. 새로이 깨달은 진실을 속으로만 되새기며, 그는 미소 지은 채 자현의 입과 뺨에도, 머리카락에도 입을 맞췄다.

형의 미소와 간지러운 애정 행각에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는지 자현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이 잦아들자 자현은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형을 죽게 하기 싫으니까… 최선을 다할게요. 형이 준 것들로요.”

“그래. 형은 비겁한 사람이라서, 형 목숨으로 너를 협박하고 있던 거거든. 통했다니 다행이네.”

“…알면 됐어요. 빨리 가서 처리하고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지만 권경우는 자현의 손을 놓지 않았다. 가이딩을 멈추지 않으며 데이트라도 나온 것처럼 손잡은 채 태연히 따라오는 모습이다. 자현은 난감한 표정으로 형의 손을 떼어 내려 하며 말했다.

“형!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제가 얼른 갔다 올게요.”

“알았어. 마중 나가는 거야. 마중 나와 달라며.”

“아니, 그건 밖에서죠. 엔티티가 코어 위치에 묶여 있긴 해도, 더 가까이 가면 위험하다고요. 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더 이상 한계였다. 그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폐부를 쥐어짜듯 강해지는 압박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애를 전쟁터에 내보내는 기분이야. 알아?”

형 앞에서 웃음이 헤픈 아이가 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하면서도 귀를 붉혔다.

“형이 저 이길 수 있게 이것저것 많이 해 줬잖아요. 못 믿어요?”

“믿지.”

“그러니까….”

“나는 너를 믿는 거야. 내 앞에 있는 너를.”

“…….”

이제는 그의 눈에도 부서진 오라클의 모습이 보였다. 멀리, 흐릿한 실루엣으로나마 홀로 서 있는 코어 엔티티는 등급에 걸맞게 주변 환경마저 왜곡해 버릴 정도로 강렬한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놈은 자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따라 했으나 권경우는 놀라지 않았다. 껍데기가 조금 비슷할 뿐 우스울 만치 전혀 다른 엔티티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별것도 아니네. 얼른 이기고 돌아와.”

권경우는 그제야 자현의 손을 놓아주었다. 내내 넘치도록 가이딩을 쏟아 넣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자현은 바로 가는 대신 머뭇거리다 형을 와락 껴안았다. 아무 말 없이 형을 꽉 안고 있는 자현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권경우가 속삭였다.

“나가서 얘기할 것들이 아주 많아. 사랑한다는 말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제대로 다시 할 테니까.”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그는 자현의 붉어진 귓가에 입술을 문지르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가서 기적을 보여 줘.”

포옹을 푼 자현은 쑥스러운지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어설프게 가리고 몸을 돌렸다. 손도 몸도 완전히 떨어졌지만, 자현은 계속해서 제 안에 힘이 차오르고 있는 걸 느꼈다. 그를 감싸고 있는 모든 곳에, 그 시선에, 믿음과 애정과 경외심이 담겨 있었다.


***


종종 가이드의 가이딩은 에스퍼에게 로켓 추진 연료 같은 걸로 비유되곤 했다. 가이드 저장 기능이 개발된 다음에는 더욱이 이능력을 위한 엔진 연료로 여겨지곤 했고.

하지만 직접 겪어 보니 조금 달랐다. 뭐, 어느 정도 맞기도 하지만…. 형이 그저 저를 안아 주는 것만으로도 감당 안 되는 추진력이 생기니까. 가끔 무서울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꼽자면…. 공기와 비슷했다.

없으면 죽는 존재.

그리고 적절한 조건만 충족된다면 공기는 500톤이 넘는 비행기도 받쳐 하늘로 띄워 올릴 수 있다. 또한 알바트로스라는, 날갯짓으로는 제자리에서 날 수 없는 거대한 새조차도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뛰어가는 것만으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이 가볍다.

묵직한 믿음이 공기처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했던 것처럼, 숨을 들이쉴 때마다 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힘이 온몸을 돌았다. 한 세기가 끝나도 멈추지 않을 것처럼 에너지가 차오른다.

가볍게 땅을 딛는 동작만으로도 놈의 시야보다 위를 차지할 수 있다. 심장이 펌프질하며 피가 도는 감각, 탁 트인 깨끗한 시야에 풍경이 눈에 담긴다.

찰나의 순간, 밑을 내려다보자 내 얼굴로 비웃음을 짓고 있는 엔티티와 눈이 마주쳤다. 놈이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입을 열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껍데기가 깨져 나간 듯이 지직거리는 엔티티의 모습은 직전의 고통이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형이 있으니까.

등 뒤에서 믿음이, 그 무엇보다 무겁고 단단한 마음이 닿는 걸 느낀다.

나를 숨 쉬게 하고 하늘로 띄워 올려 받쳐 주는 그 믿음이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내 움직임만으로 갈라지는 공기의 날카로운 파공음이 고막을 울리고 검날을 떨리게 했다. 나는 검날에 에너지를 한계치 이상으로 욱여넣으며 미소 지었다.


***


권경우는 자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백 미터를 가로질러 내리꽂히는 섬광. 한낱 평범한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조차 어려운 경지의 이능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갈랐다.

그건 단순히 더 강해졌다고 표현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경외’라는 특성을 구체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능력을 사용하는 권자현 본인조차도 깨닫지 못한 새로운 이능 메커니즘을 최초로 목도한 인간이 된 것이라고.

한순간의 기적으로 깨어져 나간 가짜 하늘의 차원 틈새에서 빛이 쏟아졌다.

어떻게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깨끗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또한 그 사랑으로 그를 진정 구원해 낸 존재를 숭배하지 않는 법을 알지 못했다.

그는 눈이 부신 기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올려다보았다.

그의 삶 내내 우러러볼, 단 하나의 찬란한 빛을.



[저는 형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完

<에필로그>




⁠⁠⁠⁠⁠⁠⁠⁠⁠⁣⁠⁠⁣⁠⁠⁠⁣⁠⁣⁠⁣⁣⁠⁠⁠⁣⁠⁣⁣⁠⁠⁠⁣⁠⁣⁣⁣⁣⁠⁣⁠⁠⁠⁣⁣⁣⁠⁠⁣⁣⁠⁠⁠⁠⁠⁣⁣⁣⁣⁣⁣⁣⁣⁠⁣⁠두 달 후.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플래시 세례 속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있기란 힘든 일이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멋진 표정과 포즈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플래시랑 눈싸움을 하는 사이 누군가 다가와 목에 뭔가를 걸었다. 사람 상체만 한 꽃목걸이가 또 걸렸다. 3개, 아니, 4개째인가? 하나만 더 걸었다간 얼굴이 안 보이게 생겼다. 나는 그런 와중에도 인파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으려 눈을 굴렸다.

백널 게이트에서 돌아온 뒤, 꽤나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나는 게이트에서 나오자마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게이트 안에서는 괜찮다고 느꼈는데 실제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 덕분에 너무 행복했던 데다 내 힘과 전투의 고양감에 취해서 아드레날린에 푹 절어 있던 탓이다.

기억은 안 나는데, 기절하면서 코피까지 줄줄 쏟고 드레싱 해 뒀던 곳의 상처도 옷 밑에서 다 터져 있었다고 한다. 박 교수님이라는 의사가 말하길, 내가 수명 깎아 먹는 짓을 한 거라고.

당연히 형은 완전 뒤집어졌다. 며칠 뒤에 내가 의식을 찾자마자 세 달의 요양 감금을 선언했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입가만 억지 미소를 띠며 말하는 형이 너무 무서워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 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찍소리 못 하고 눈치 보면서 알겠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또 그렇게 병실을 탈출하거나 도망치면 안 된다고, 형 죽는 꼴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는 협박을 열 번도 넘게 들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형의 목을 끌어안고 잘못했다고 빌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거듭 약속했다.

그러자 형은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며 미안해했다. 내가 그건 괜찮다고, 내가 오해한 거라고 하자 형은 사과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그래도 혼은 나야 한다면서 퇴원하고 5번을 열흘 내내 안 쉬고 할 거라고 각오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알겠다고 했더니 형은 바로 누그러들어서는 다시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고 그러지 않을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걱정한 건 아니었다. 상상은 잘 안 되지만 그게 싫을 것 같진 않았으니까. 열흘까지는 좀 힘들 것 같지만 나도 빨리 다 나아서 형이랑 5번을 하고 싶었다. 처음에 했던 건 형이 날 안 좋아하는 줄 알고 있던 상태에서 한 거였고, 두 번째는 오라클 지하에서 했지만 잘 기억나지도 않았다.

지금은 형이 날 많이 좋아하는 걸 알고 있으니까, 5번 하면 엄청 좋을 것 같아서 조금 기다려지기도 했다. 슬쩍 그렇게 말했더니 형은 나한테 발랑 까졌네, 어쩌구 하면서 요양이 다 끝나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쌓여서 그런 줄 알고 화장실에 데려가 내 걸 빨아 줬다.

황당한 것은 그렇게 난리 친 형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는 거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형도 중환자나 마찬가지였다. 뼈에 금이 간 곳만 해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고등급 게이트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게 그대로 몸에 데미지가 쌓였다고 한다.

심지어 형은 그저 평범한 사람의 재생력을 가졌을 뿐이니 나보다 더 집중 치료를 받아야 마땅했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자, 기분이 너무 저조해져 화가 나고 울적해졌다. 그러자 형은 오히려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치고 아픈 걸 숨기는 건 굉장히 좋지 않은 일이었다. 역지사지를 제대로 느꼈다. 3개월이 아니라 6개월이라도, 형이 원하는 만큼 요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형이라고 해도 마냥 나를 가둬 둘 수만은 없었다. 일은 하지 않더라도 내가 멀쩡하다는 걸 외부에 보여 줄 필요는 있었으니까.

그리고 백널 게이트를 처리한 건 전 세계의 엄청난 이슈감이었으므로, 다들 날 무슨 이유로든 부르고 싶어 안달이었다. 결국 개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거절하기 어려운 공로 치하의 자리에 이렇게 얼굴을 비추게 된 것이다.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는 백널 게이트가 다 내 탓인 것처럼 비난조로 등 떠밀듯 추궁하는 기자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다. 태세 전환이 빨랐다. 어쩌면 형의 입김이 들어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꽃다발까지 건네받은 나는 거의 화환 인간이 된 채로 입을 열었다. 스탠드 마이크라 다행이었다.

“제가 해야 마땅한 일을 했음에도 이런 자리를 만들어 주신 분들, 그리고 이 자리에 와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보내며 마음으로 저를 응원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나는 여전히 내 이미지에 맞게끔 딱딱한 목소리를 냈으나, 말의 내용을 고르는 데에는 좀 더 마음을 편히 가졌다. 모두에게 받는 경외에 더 이상 목맬 필요가 없었으니까. 내게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보다 중요하고 나를 가장 경외하는 한 사람이 있기에.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제 곁에서 저를 항상 지켜 주고, 지지하고, 도와주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지 못 했을 겁니다. 그분께 제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린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누군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리둥절하고 흥미 가득한 얼굴로 웅성거렸다. 준비했던 것보다 좀 과하게 말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형이 알아서 수습해 줄 것이다.

짧은 소감을 마친 뒤, 박수갈채가 터졌다. 나는 목에 맨 꽃들을 곁에 있는 직원에게 모두 넘기고 무대의 뒤로 돌아갔다. 내가 찾던 사람은 거기서 모니터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

내 목소리를 듣기도 전에 형은 빙긋 미소 지으며 내게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별것도 아닌데 그냥 막 웃음이 났다. 이제 내게는 내가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이리 오라고 부르며 손을 뻗는 사람이 있었다. 내 유일하고 완전한 가족이자 애인인 형이 언제든 나를 안아주리라는 것을 안다.

나는 한결 편해진 태도로 미소를 억누르지 않으며 형에게 뛰듯이 다가가 안겼다. 들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잎이 콘페티처럼 쏟아졌다. 형이 나를 꽉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수고했어.”



[에필로그] 完